즐겁게 지역운동 하는 법!! - ‘대전여민회’를 찾아
인터뷰 : 김최진연(사무국장)

요즘 들어 몇 몇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참여 활성화를 위한 참신한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여전히 흡족하진 않지만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 흐뭇해진다. 서대문구립보육시설의 시설운영위원회 설치라든지 청주의 시민참여기본조례, 그리고 군포의 자전거 이용활성화 조례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주민소환을 제외하고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제도가 도입되었고, 주민소송은 얼마 후면 입법될 예정이다. 법․제도적 장치의 마련은 정책프로그램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측면에서 주민참여를 위한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도의 도입이 곧바로 주민참여 활성화와 등치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도는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주체들의 의식과 의지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 아니면 그 제도의 가치를 전혀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제도는 부차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공허할 수가 있다. 원탁에서, 밀폐된 공간에서 합의된 하나의 정책이 내용적으로 훌륭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 또한 훌륭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조례 제․개정운동을 통해 혁신적인 조례를 만들고 참예예산을 통해 주민들이 직접 필요한 영역에 예산을 편성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학습과 교육, 소통과 공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주민참여제도를 만드는 것만큼 실제로 주민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게끔 주민들 간의 공론의 장이 마련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역운동이 간과하지 말아할 할 것은 이런 대목이 아닌가 싶다.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을 처음 만났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런 운동이 일상을 변화시키고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와 똑같이, 이번 인터뷰 대상인 ‘대전여민회’도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대전여민회’라는 단체의 활약상을 가끔씩 듣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대전 여성민우회를 지칭한다고 생각해왔다. ‘대전여민회’가 하나의 고유명사임을 이번 기회로 알게 되면서, 죄송한 마음 한편으로 ‘대전여민회’가 도대체 어떤 단체인지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두말없이 대전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KTX는 정말 빨랐다. 대전까지 채 1시간이 안 걸리다니.

먼저 거쳐야 할 코스. 대전여민회의 역사는?

“87년 이후 비슷한 이름의 여성단체들이 많이 생겼는데, 87년 민주화 항쟁이 끝나고 박종철 사건 전에 권인숙 씨 사건이 있었잖아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어야 하고 군부독재가 사라져야 하지만, 여성의 문제는 역시 여성의 문제로 또 한 편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현재 민우회 같은 경우는 87년부터 ‘평우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87년에 민우회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각자 지역에서 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아니면 그 직전에 각자 서로 모르는 사이에 단체를 만든 거예요. 그 당시에는 단체 이름에 ‘민’자가 많이 들어갔어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백성을 뜻하기도 하죠. 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로 되어 있지 않아서 ‘충남여민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을 했죠. 87년 12월이었죠. 창립하고 나서 보니까, 제주도는 제주여민회가 충북은 충북 여성민우회, 대구는 대구여성회, 전주는 그 당시 전주여민회, 이런 식으로 이름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거죠. 87년 전후로 해서.......저희 같은 경우는 87년 12월에 대전에 있는 학생운동 출신의 여학생들과 기독교 여성들, 그리고 일반 진보적인 주부들 100여 명이 출발했더라고요. 그래서 여민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은 민주주의 실현, 성평등 사회 구현, 평화통일, 이런 것이 저희 정관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설립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90년대 초반까지의 활동은 여전히 민주주의 연대활동이 주였었죠. 90년대 중반쯤이 돼서 비슷한 연배들이 모인 까닭에 결혼문제, 육아문제 등으로 2-3년간의 정체기가 있었어요. 상근자가 없던 시절이었죠. 이런 시기를 거쳐서 애를 조금 키워 놓고 보니 이미 사회가 시민운동으로 전환한 시기였고, 그래서 지역에서도 여럿 시민단체의 창립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죠. 그 때 저희도 다시 모여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는데, 대중조직으로 한 번 고민해보자, 그 동안 앞장서서 선도적인 운동을 주로 해왔다면 이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자, 이런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합의가 된 것 같아요. 현재 부회장으로 있는 김경희 씨가 사무국을 다시 구성하게 되었는데, 당시 자치부녀회 회장 출신이었어요. 그 분이 대중조직으로서 생활운동, 여성운동을 주도한 거죠.”

87년에 창립. 90년 중반에 정체기. 그리고 90년 후반부터 재창립의 시기를 겪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남여민회’에서 ‘대전여민회’로 바뀌게 된 시기는 대전이 광역시로 바뀐 90년대 초반이었다. 풀뿌리운동과 여성의 과제를 대변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전략이기도 하다. 사무실은 현재 중구에 위치하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규모의 사무실이었는데, ‘대전여민회’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시는 분이 건물주이기 때문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사무실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단다. ‘대전여민회’는 어떤 활동을 하는지 물었다.

“여성운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것을 다 해요. 대부분 광역에서 여성단체들이 여럿 있는데, 대전 지역은 특이하게도 여성단체가 저희밖에 없어요. 저희가 분화를 못한 측면이 있고, 대전이 갖고 있는 운동의 고유한 역사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전이 운동을 주도하거나 앞서가는 그런 곳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저희 단체가 모든 영역의 일을 다 하게 되요. 노동상담이나 가정사담도 하고 최근에는 성매매 관련해서도 하게 되고, 약하지만 평화통일 관련된 일도 하고 있고요, 그 다음에 정치세력화 관련된 일도 하게 되고요. 여성정치 이슈들, 연대활동은 당연하게 하는 거고, 교육사업도 하고요, 안 하는 것이 없죠. 저희만의 개성이라면 문화 영역도 다룬다는 겁니다. 연극모임, 영화, 문학모임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시도 짓고, 연극은 올린 지 한 7년 정도 됐고요, 나름대로 아마추어지만 전문극단 못지않게 실력을 쌓았어요. 영화도 1-20분 정도의 분량을 직접 찍기도 했어요. 여성문화제도 개최하고, 아무튼 다양하게 합니다.”

활동의 반경은 매우 넓었다. 이런 일상적인 활동 이외에도 3.8여성대회, 풀뿌리주민운동, 여성문화제, 각종 캠프 등 한 해가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상근자는 4명이다. 12월에 1명, 내년 1월에 1명이 더 결합하면 6명이 된다. 단체에 등록된 회원은 900명. 이 중 회비를 내는 회원은 500명. 여기까지 여타의 단체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실제로 활동하는 회원, 즉 정기적으로 찾아오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의 수가 130명이라고 했을 때에는 만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30여 명의 활동 회원들이 12개의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분기별로 새로 가입된 회원들을 위한 신입회원 교육이 있어요. 그 교육을 막 마치고 오신 분들은 뭔가 여민회의 색깔에 조금 감이 온다고 하면서, 아직은 소극적인 분들 같은 경우, 그러니까 6개월이나 1년 미만의 분들은 그냥 주변에 누가 좋아서, 아니면 주변에서 누가 권해서 나오는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고요, 3년 이상 된 분들, 내지는 조금 더 빠른 분들, 그러니까 시민의식이 높은 분들 같은 경우는 연차와 관계없이 굶주렸다는 듯이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긴 해요. 대체적으로 활동하시는 회원들은 개혁적이라고 볼 수 있고요, 아주 여민회의 이념에 일치해서, 모든 것에 동의를 하냐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도 다양성의 시대가 열려서, 옛날에는 생각이 정말 동일했거든요. 너무 동일해도 좀 문제가 있지만, 국가보안법 문제도 거의 대부분이 폐지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한 두 분 정도는 개정을 통한 절차를 밝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내시기도 해요.......소모임은 12개 정도 되요. 각 소모임에 팀장님이 있는데, 팀장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중간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실무자는 굉장히 강력하고 전업적으로 하니까 앞서 있고요, 회원들은 구성원에 따라, 몇 년에 들어왔느냐, 어떤 위치의 활동을 할 것이냐에 따라 편차가 있죠. 이런 조건에서 팀장들은 소모임을 이끌면서 중간역할을 하고, 대중성도 띄어야 하고, 진보성도 견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팀장님이나 위원장님들의 고민을 제일 많이 알고 있어요. 이끌어내고 정보를 제공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개혁적으로 변화되는 것 같아요.”

중간지도로서 팀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반회원과 실무자들 간의 다리 역할은 물론이고 개별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최진연 국장은 연거푸 팀장들이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전여민회’는 사단법인이다. 그래서 최고의사결정 단위로 이사회가 있다. 팀장은 선택적으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사회에 참여하려면 2년 이상의 활동과 추천이 있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팀장이나 각종 위원장의 선택적 몫이다. ‘대전여민회’는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할까?

“저희는 서구 지역과 중구 지역 활동을 주로 했는데, 서구 지역 같은 경우에는 98년부터 주민프로그램이 대표적이에요. 주민결합형, 밀착형 사업이 활동의 방향이고, 이를 위해서 아파트 만들기를 위한 시민학교, 대전여민회 사랑방, 등의 프로그램을 하면서 아파트를 어떻게 주민들이 참여해서 잘 운영할 것인가, 아파트 전문가나 법률가를 부르기도 했고요, 또 주민들이 주체가 되서 할 수 있는 도서관 만들기, 아파트 회보를 만들기도 하고 주민잔치도 해보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연극 교실, 만화교실도 열어보고, 그리고 각자 그린 그림이나 주제를 가지고 행사도 해보고, 이런 활동을 꼼꼼히 해왔어요. 이런 활동과 별개로 저희 여민회 내에는 주민자치위원회라고 하는 위원회가 있어요. 여기에서 98년부터 99년, 2000년, 2001년까지 계속 서구의회 방청을 해서 모니터 자료를 내기도 했어요. 2002년에는 서구의 탄방동에서 우리 단체 부회장이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기도 했죠.”

주민 밀착형 운동의 효과는 서구의 탄방동의 러브호텔 건립저지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민들의 스스로 결합하고 반대운동의 주체로 나섰다는 것이다. 주민과 평상시에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말한다. 아무튼 긴 시간 동안 김최진연 국장은 서구와 중구에서 진행했던 풀뿌리운동을 설명해주었다. 중구에서도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나눔장터, 각종 문화행사, 어린이 관련 연극/만화교실/캠프/경제교실/벼룩장터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 풀뿌리 운동 과정에 현 서구의회 의원이 장현자 의원을 배출하기도 한 것이다. ‘대전여민회’는 생활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서구와 중구는 경제적인 상황이 좀 달라요. 서구는 프로그램의 특성만 가져가면 일정한 회비나 참가비를 내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요, 프로그램의 질과 내용을 충분히 갖고만 있다면 만나기 쉽죠. 그러나 조직하기는 더 어려워요. 쉽지가 않더라고요. 어린이 프로그램을 많이 앞세우는 이유가 엄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데, 엄마를 만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엄마를 직접 만나지 않는 한 쉽지 않은데, 보통 한 사람이 오기에 한 3년이 걸리니까, 어린이를 충분히 만나서 그 어린이를 통해서 여민회에 대한 거부감도 없애고 한 번, 두 번 오게 되고 그러다보면 꾸준히 오게 되는데, 조직률은 중구와 서구가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중구에서 저희를 늘 보고 가까이 오는 분들이 더 빠르다고 할까요, 그런 차이가 있어요. 중구 같은 경우에는 돈을 내서 하는 프로그램은 잘 안 되죠. 프로그램의 질이나 내용보다는 아무래도 생활형편이 더 어려우니까 무료라면 보내고, 그런 차이가 있죠.”

지역의 상황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말한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한 지혜였다.

“서구에서 소모임은 아직 시작해보지 않았죠. 그 동안은 프로그램 위주로 진행했는데, 선택해서 와서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아이들을 다시 보내지 않고 엄마들도 나타나지 않는 형태였다면, 올해 처음으로 서구에서 시도한 것은 어린이 경제교실과 어린이 벼룩장터를 하면서 한 쪽 코너에서는 엄마들이 떡볶이와 어묵을 팔게 했어요. 처음부터 같이 준비한 거죠. 그 프로그램을 하고 나서 모든 참여자들의 평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다음에도 또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서구는 아주 낮은 수위의 참여부터 시작해서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 거고요, 중구 같은 경우는 주민 분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데, 동화 읽는 엄마 모임 같은 경우, 저희에게 와서 지켜봤더니, 처음에는 종교단체인줄 알았데요. 장터 열고 봉사하면서 전도하려고 하는 것 같고.......(웃음) 그런데 그런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동네 분들을 모아 오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모이면서 소모임 활동을 하게 되고, 여기에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겠다, 그렇게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처음에 지켜보던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스스로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되었죠. 경제교실 팀도 마찬가지에요. 경제교실을 저희가 처음 했는데, 그 공부를 열심히 하시더니 이제는 엄마들이 강사가 됐어요. 그 강사진을 가지고 서구에서 한 거죠. 그런 주체형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대전여민회’ 사무실 바로 옆에는 놀이터가 있다.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를 벌인 모양이다.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종교단체 행사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주민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성을 주체로 세우는 방법은 뾰족한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분은 우리의 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돼서, 또는 교육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돼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제도권 교육은 강제 교육적 성향이 있으니까 무조건 참여토록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주민들이 선택하는 거고, 또 많은 것이 열려 있고, 해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를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 그리고 이후의 조직화 과정까지 고민할 지점이 많이 있죠.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 열 번 스무 번 고민해야 되니까요.......그래서 어려운 일이죠.”

한 명의 주민을 참여시키기 위해 삼고초려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다. 그러나 일단 참여의 통로로 들어온 주민들은 ‘참여’ 이상의 경험을 갖게 된다. 정치적 의식화의 과정이기도 하고, 리더십의 창출이기도 하며, 동네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자기 몫을 찾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조직이나 개인, 그리고 동네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여튼 더 많은 어떤 프로그램이든 뭐든, 주민과 밀착하려는 계획이 필요하고, 그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의 속도와 내용으로 주민이 그것을 주체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시민단체는 시키고 주민은 구경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런 관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이렇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위에서 주고 밑에서 받고 하는 모습은 초기에는 없을 수 없다고 봐요. 전술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더 소수의 엘리트의 전문가 집단이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그것이 뒤집혀서 주민 참여형, 밀착형의 모습으로 주민들이 주체로 형성될 때, 그것이 조금 원하는 바가 낮아지더라도, 그렇게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런 것에 많은 시민단체든, 풀뿌리 단체든 생겨나서 가야 될 것 같고요, 먼저 그런 것을 깨달은 집단이나 개인이 시작할 수밖에 없죠. 과거에는 그것조차도 영웅형 스타일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민주적 지도자가 민주적 수렴과정을 거쳐서 같이 하고 그리고 내 것을 빨리 나눠서 같이 참여하게 하고, 기획부터 마무리, 평가에 이르고 다시 기획하기까지 전부 주체를 넓히고 바꿔주는 형태로 가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까(웃음). 역시 사회 분위기와 연관도 많이 있고요. 사회적으로 참여형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렇게 바뀌면, 주민들 스스로도 뭔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가질 수 있겠죠. 이런 큰 사회 구조라는 분위기와 같이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풀뿌리가 풀뿌리로만 존재할 수가 없어요. 풀뿌리가 잘 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개혁적으로 가야하고 참여형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시민단체는 이런 맥락에서 같이 수행을 해야 되는 거겠죠.”

그렇다. 풀뿌리는 작은 영웅들이 많아질 때 더욱 힘이 커진다. 한 명의 영웅이 동네를 바꾸는 것보다 작은 영웅들이 더디더라도 동네를 바꾸는 일에 무게 중심이 옮겨있다.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세 가지 요소를 주문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참여’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풀뿌리 세력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진영이 참여형 사회로 갈 수 있도록 부채질을 하면서 동시에 풀뿌리로 가야 한다. 두 번째는 지역운동단체가 ‘마중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긴 힘들다. 누군가 독려해야 하고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 물이 잘 넘쳐나도록 ‘마중물’을 붓듯, 지역운동이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모든 활동이 주민을 주체화시키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기, 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하는 것이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주민자치의 정형화된 상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저희끼리 많이 토론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인데, 그게 모임의 형태는 소모임일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예를 들어서 이런 문제에 실제로 많이 접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정말 회사 내에서 완전하게 풀 수 있을까? 풀어야 되는데, 회사가 민주화되고 거기도 노동자 참여형으로 변하면서 서로의 간극이 없어져야 하고, 남녀의 대립, 노소의 갈등 등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현장에서 원칙만 세운다고 가능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을 실현하는 곳의 하나가 지역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만남, 이렇게 만나지 않잖아요? 직장이 아니니까. 그리고 남과 여의 심한 대립, 이렇게 만나지 않잖아요. 주민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동등하게 만나는 측면이 있어요.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비정규직 다르고 남자라고 다르고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현장과 지역이라고 하는 곳에서 동시에 그런 과제가 수행되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빨리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희끼리 여러 번 나누었어요. 여민회는 이런 원칙을 늘 확인하면서 가죠. 그랬을 때, 나중에 단체가 빠지고 자율적인, 정말 스스로가 동네에서 작은 모임이든 큰 모임이든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봐요. 그러나 지금 현재 시점에서 우리 같은 단체가 개입을 많이 해서 동네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그들 스스로가 주민자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조금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으로 의식화되는 것도 필요하겠죠. 그러다보니까 저희가 밖에 소모임을 두지 않고, 일단 아직은 저희 여민회 내부로 끌어주면서 소모임 활동을 유도하면서 단체가 좀 더 개입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써는 이런 모습이 주민자치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한 동네에 거주한다고 곧바로 정주의식이 발동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정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작지만 공동체의식이 싹트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자든 사업주든 갈등이 대립되어 나타나진 않는다. 이익에 대한 갈등도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동네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작은 해우소가 될 수 있다. 대립과 갈등을 묻어두는 곳. 주민자치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희미하지만 존재하는 작은 단위에서 출발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정형화된 상은 제시할 수는 없지만.

“동네의 리더십 문제도 저희가 고민을 많이 해요. 저희의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는 묻혀 있는 좋은 리더십을 개발하는 것, 또 하나는 기존에 있는 리더십을 드러내는 것. 올해 한 번 시도했거든요. 주민자치위원회들이나 부녀회장, 지역에서 나름대로 유명하고 필요한 역할을 하는 일꾼들을 모셔서 리더십 캠프를 열어봤어요. 그런데 이 분들의 특성이 지역에서 온갖 굳은 일을 다 해요. 부녀회장이든 누구이든, 쓸고 닦고 무슨 사고 생기면 달려가서 굳은 일 하고, 김장 담그는 이런 일을 다 하시는데, 정작 리더십 교육을 받은 분들이 없으시니까, 정말 교육을 열심히 받으셨어요. 그런 것을 시도하면서 조금씩, 한발씩 다가갈 수 있고, 이 분들이 지역에서 봉사하시는 그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봐요. 그냥은 소박하지만 동네에 묻혀 있는, 그리고 저희는 누구나 리더십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리더십을 깨우쳐 주는 프로그램을 해보자, 그래서 내년에는 그런 사업이 구상되어 있어요. 더 남들보다 헌신적이고 나서길 좋아하는 분들이 동네에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달아요.”

여성의 리더십을 일깨워주고, 또 드러난 리더십을 발현하게 하는 일. ‘대전여민회’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인 것 같다. 그것은 주민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 안에 리더십 있다!!

‘대전여민회’의 이름으로 진출한 지방의원이 있다. 대전 서구의 장현자 의원. 정치참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저희가 2002년 지방선거에 참여한 것은 사회적 분위기가 큰 이유였죠. 그 전에 민우회가 여러 차례 당선이 됐어요. 그래서 그런 것도 있고, 더 큰 것은 지방자치가 두 번, 세 번, 이렇게 오면서 전체적인 운동의 흐름 하나가 생활운동 영역으로 가는 것, 그리고 사회도 주민자치, 지방자치에 시민, 주민이 나서는 것, 이런 큰 흐름이 역시 저희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모델 단체, 민우회가 보여준 모델, 그리고 다른 각 시민사회단체가 보여준 모델, 우리도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세 번째가 개인의 결단, 한 번 나가보겠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김용분 의원의 모델이 있었고요, 그것이 결합돼서 우리도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물론 그 전에 치열한 논의를 한 것은 아니죠, 그런 대체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한 번 해보자, 이렇게 한 거죠.”

지역정치 참여를 두고 단체 내부적으로 약간의 마찰음은 있었지만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한다. 소모임에서 활동하는 회원들과 주민자치위원들이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물론 장현자 의원이 지역 내에서 꾸준히 풀뿌리운동을 전개해 오면서 헌신적인 리더십을 발현한 것이 당선의 요인이기도 했다. 밑에서부터 바닥을 다져온 것이 신뢰를 얻은 것이다. 의원과 단체의 지향성이 일치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불협화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와 다르다고 생각해요.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저희 대전여민회는 우리의 후보라고 하는 개념 안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진보성, 이념이라든지 그것을 포함하는, 그 이념을 반영한 정책이라든지, 활동이라든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실천으로써 보여주는 것이거든요.......당선 이후에 갈등보다는 저희가 지원을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이미 다 아시겠지만, 갈 때는 대전여민회 단체 후보로 나왔지만, 가서는 모든 영역,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모든 분야를 다 다루기 때문에, 환경 사안은 저희가 접근을 해도 잘 못한다든지, 그래서 환경단체와 함께 한다든지, 그리고 다른 법, 제도의 문제는 참여자치랑 함께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저희는 여성적 사안만 같이 하기 때문에, 사실은 의원이 되고 난 이후는 우리의 의원이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라는 것이 확 넓혀져서 우리의 후보일 때는 대전여민회 후보였지만, ‘우리의’ 의원일 때의 ‘우리’는 모든 시민사회단체, 내지는 진보성을 갖고 있는 개인까지 포함한 우리의 정치인, 이렇게 넓혀지더라고요. 그런 것이 있어서, 저희가 이론적으로 논쟁을 하거나 쌓여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은 지역정치의 가장 우려스런 점이겠죠. 그런데 역으로 기존 정당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써 당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들의 당이 필요하다고 봐요. 기성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아니라,(웃음) 그런 당이 있어야지 개인의 변절, 변질, 내지는 서운함, 이런 것이 조직적으로 극복될 수 있잖아요? 저희는 아직은 그런 것을 깊이 고민해서 마찰을 일으킬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고민까지 나가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런 것이 있어요.”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장현자 의원을 ‘우리의 의원’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대전여민회’를 뜻하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그리고 그와 이념을 같이 하는 모든 이들의 의원인 것이다. ‘대전여민회’ 스스로 ‘나만의 의원’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독자적 후보 전술의 ‘폐쇄성’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한 명이 진출한 것은 물로 미약하다. 그러나 그 한명의 의원이 가져다 준 성과는 엄청났다고 김최진연 국장은 말한다. 대전 구 단위에서 최초로 보육조례를 제정했고, 서구 지역의 난개발을 번번이 좌절시켰으며, 크고 작은 각종 정보를 쉽게 얻어 볼 수 있었다. 지방의원은 동등한 협력자였다. 김최진연 국장은 다가올 2006년 지방선거도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회원들 간에 분위기는 고조되었지만, 한편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는 일이다. 결국 주민의 힘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지와 저력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착실한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루어졌다. 바쁘게 갔다가 바쁘게 돌아와야 했다. 다음에 기회다 닿으면 다시 한번 ‘대전여민회’를 찾고 싶다. 내게 매력적인 단체였다. 끝으로, 그 동안 지역정치 참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으로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글쎄요, 어렵네요.(웃음) 시민사회단체가 한편으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더욱 더 세밀하게, 더 고민해서, 정말 주민을 주체로 세워서, 이렇게 뿅 하고 한두 명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과감하게 전환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풀뿌리가 풀뿌리로 설 수 없거든요. 법이 바뀌어야 하고 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그리고 누군가 앞장서서 민주사회를 위해서 외쳐주어야 하고, 이런 큰 역할분담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요, 그래서 시민사회운동진영이 더 분화되고, 회원 중심형으로 바뀌어야 하고, 이런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는 시험단계였던 것 같아요. 개별적으로 해보기도 하고, 당으로도 넣어보기도 하고, 지방의원도 해보고, 중앙도 해보고, 민주노동당은 10명이 진입했고.......시험단계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과정이었다면 이런 것을 잘 평가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잘 논의해서, 잘 준비해서 해야겠죠.”

※대전여민회의 홈페이지는 http://www.tjwomen.or.kr/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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