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운동 일반'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07.10.23 [자료] "한미FTA타결안 긴급 평가 토론회"-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2. 2007.10.23 [자료] "세계화시대 관료독주와 민주주의의 위기"-참여사회연구소
  3. 2007.09.28 설문조사를 통해 나타난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의 활동 방향
  4. 2007.09.28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해 노동운동에 드리는 제언"
  5. 2007.09.28 민주주의 문제와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
  6. 2007.09.28 "운동할 때 버려야 할 몇 가지 아까운 것들"
  7. 2007.09.28 '우리들의 리그'를 위해
  8. 2007.09.28 한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사회운동포럼 2007
  9. 2007.09.23 [자료집] "공공성과 한국사회의 진로"-참여사회연구소
  10. 2007.08.30 2007 대선시민연대 출범 선언문
  11. 2007.08.06 2007전국시민운동가대회 자료집
  12. 2007.07.24 2007 시민.환경활동가대회 결의문
  13. 2007.07.09 "진보는 없다" - 박승옥
  14. 2007.07.06 소통과 연대·지지와 활력 넘치는 집회·시위를 고민하다
  15. 2007.06.25 한국의 시민운동, 정말 '시민없는 시민운동'인가?
  16. 2007.06.25 지금 시민운동에는 어떤 시민교육이 필요한가
  17. 2007.06.25 [토크빌의 시민사회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18. 2007.06.25 시민운동 10년이 낳은 문제
  19. 2007.06.25 현실 정보사회와 시민운동
  20. 2007.06.25 시민사회의 구조와 변동, 1987-2000
  21. 2007.06.23 [자료집] "시민사회의 성장과 시민사회운동"-참여사회연구소
  22. 2007.06.01 민관협력은 어디쯤?-“푸른경기21실천협의회”를 찾아
  23. 2007.06.01 민관협력은 어디쯤?-“푸른경기21실천협의회”를 찾아
  24. 2007.06.01 노동자의 참여, 산업재해를 줄이는 지름길. ‘POSITIVE 프로그램’ 이야기 - 노동건강연대 -를 찾아
  25. 2007.06.01 이주노동자들의 오아시스 -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를 찾아 -
  26. 2007.05.21 "세상을 바꾸는 현장보고서"-오관영
이 자료는 지난 2007년 4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가 민주노동 교육원에서 개최한 한미FTA타결안 긴급 평가 토론회 자료입니다. 참여사회연구소 자료실에서 가져왔습니다.
각 9개 분야별로 평가의 글이 실렸습니다.
참고하세요.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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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참여사회연구소가 지난 2007년 10월 개최한 심포지엄의 자료집입니다.
홍기빈, 장화식, 이정환, 윤태범 선생 등의 발제글 등이 실렸습니다.
참고하세요.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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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라는 모임이 있다. 생소한 분들을 위해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을 간략히 소개하면,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함께하는 시민행동’,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그리고 몇 몇 개인 변호사들이 공익법운동을 전개하고 지원하기 위해.............(본문 내용 중)

설문조사를 통해 나타난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의 활동 방향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라는 모임이 있다. 생소한 분들을 위해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을 간략히 소개하면,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함께하는 시민행동’,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그리고 몇 몇 개인 변호사들이 공익법운동을 전개하고 지원하기 위해 2005년에 만들어진 모임이다.(http://www.action.or.kr/home/guide/) 1년여 동안 주민투표, 주민발의, 주민감사청구, 주민주표 그리고 주민소환 등의 주민 직접참여제도를 연구하였고, 그러한 성과로 2006년에 “주민직접참여제도 실무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이 모임에서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3월5일부터 3월15일까지 실시된 이 설문은 이메일 설문조사 형식이었기 때문에 설문에 참여한 활동가는 많지 않았지만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의 활동방향에 적잖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여기서는 주요한 문항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설문은 기본 문항을 제외하고 모두 10개 짧은 문항으로 되어 있다. 응답한 활동가는 모두 77명이었다. 우선, 상시적으로 법률전문가들의 지원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구조인지를 물었다.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다

28명

36%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47명

61%


예상했던 대로 법률전문가들의 도움을 일상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 중 61%가 도움 받기 쉽지 않다고 답했다. 대체로 단체 회원으로 있는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44%) 활동가 개인 인맥을 통해 받는 경우(27%)가 70%를 넘었다. 중앙의 큰 단체 법률지원을 통해 도움을 받는 곳도 15% 정도 됐다. 비율로만 보면 개별 단체에서 활동하는 법률전문가가 있다면 그들을 통해 법률 지원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많다고 볼 수 있지만,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그룹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고 대답하는 이들이 거의 없어 전문 지원 그룹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대목이다. 물론, 이러한 역할을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 담당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 어떤 분야를 지원하길 원하는지 묻는 문항에는 ‘상시적인 법률상담’이 52%, ‘활동가들에 대한 법률 교육’이 31%, ‘주요 이슈 집중 지원’과 ‘직접 소송 대리인 역할’이 각각 27%와 26%를 차지했다. 물론 복수 응답을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설문 결과를 놓고 보면 상설적인 기구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기타 항목에 주관식으로 답한 것을 보면 사업기획단계에서부터 함께 논의하는 구조를 만들거나 단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지원하는 구조를 원하는 이가 많았다. 이와 연동하여 “어떤 교육”을 필요로 하는지 물었고, 그에 대한 답은 아래와 같다.


주민참여제도에 대한 이해와 현황

29명

38%

지방재정에 대한 이해와 현황

16명

21%

조례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와 현황

26명

34%

환경, 복지, 도시계획, 보육 등 주제별 분야에 대한 이해와 현황

32명

42%

행정소송 및 주민소송 등에 대 한 이해와 현황

25명

32%


설문의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지역 수준에서 주요 이슈라고 할 수 있는 환경, 복지, 도시계획, 보육 등과 관련된 교육 필요성에 가장 많은 답을 해주었지만, 대체로 주민참여제도, 지방재정, 조례, 분야별 교육, 소송 등의 교육이 골고루 필요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보면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 주민투표나 주민소송과 같은 직접참여제도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세분화된 주제들을 다룰 필요성이 제기된다. 기타 의견에서도 위에 제시된 5개 항목을 단계별로 기획해서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문하는 활동가가 많았고, 지역 현황에 맞는 주제들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가들도 있었다. 관심의 폭을 조금 넓힐 필요가 있다. 특히 그 다음 질문에는 어떤 형태의 교육을 원하는지 물었고, 가장 많이 답한 항목은 “지역별 현장을 찾아가 단체의 필요에 따른 교육”이었다. 이미 설정된 교육프로그램 안으로 활동가들을 유인하는 것보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교육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러려면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이 좀 더 응집된 역량을 발휘가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지역운동에 필요한 법률 매뉴얼은 무엇인지 주관식으로 물었다. 여러 응답이 있었는데, 대체로 지방재정에 대한 부분, 분야별 법률 매뉴얼(특히 도시계획, 환경, 복지, 보육 등), (상상력이 풍부한) 조례 만들기 등의 대답이 많았다.


“주민참여법률지원단”은 다소 느슨한 모임이기 때문에 활동가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데에 많은 한계가 있다. 다만 상시적인 법률상담에 대한 방안, 활동가 교육 프로그램의 내용과 방식, 그리고 실무 매뉴얼에 대한 기획 등의 방향이 설문을 통해 제시된 이상, 중․장기적인 구상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2007년도 사업이 구체화되지 않았다면, 현재 역량과 조건을 고려하여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우선적으로 실행해 보는 것도 좋을 방법이다. “주민참여법률지원단”에 참여하는 여러 활동가와 변호사들은 지역운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옆에서 보기에 다소 느린 행보를 보이더라고,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준다면 지역과 밀착하여 호흡하는 친한 벗이 되리라 믿는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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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노동사회" 2006년 5월호에 하승수 변호사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지난 29일 '시민사회연구회[풀뿌리정책포럼]'의 내용과 관련된 부분, 특히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접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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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활동에 관하여
-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해 노동운동에 드리는 제언 -


하승수(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장/변호사)


1. 글을 시작하며

올해는 지방자치 부활 16년을 맞는 해이고, 민선 지방자치단체장을 4번째로 선출하는 해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방자치 부활이후를 되돌아보려는 시도들도 많다.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면, 아직도 주민참여는 미흡하고, 소수의 기득권집단의 영향력에 의해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좌우되고 있는 지역들이 많은 실정이다. 다수의 주민들은 지방자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관 또는 회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속에서 5월 31일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4년에 한번 실시되는 지방선거이지만, 정책선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는 지역감정, 연고주의에 의해 투표가 영향을 받고 있다. 정책선거가 되지 못하고, 합리적인 투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주민참여를 통해 걸러진 그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갑작스럽게 지역정책에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주민들이 지역정책에 관심이 있으려면, 평소에 관심을 가질 만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주민들이 지역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려면 그런 동기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운동이 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한계도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일상적인 주민참여가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근 노동운동에서도 지역사회나 지방자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이번 지방선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 지방자치에 관심을 가질 때에 한번 짚어봐야 할 문제들이 많다. 이 문제들의 상당수는 지역시민운동에도 적용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2. 활동의 주체, 의제, 방식의 변화가 필요.

노동운동을 해 온 분들과 지역문제나 지방자치 관련해서 만날 때마다 드는 솔직한 생각중에 하나는 ‘노동운동에서 익혀온 사고나 경험을 상당부분 버리지 못하면 지역에서의 활동은 어렵겠다’라는 것이다.

우선 노동운동은 단체중심, 조직중심의 사고에 너무 익숙한 것같다. 연대활동을 해도 단체중심, 조직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지역사회의 상황은 단체중심, 조직중심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하다. 뿐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해서는 지역에 사는 주민들과 제대로 접촉할 수도 없다. 지역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시민단체라고 해도 지역에 있는 주민들과 제대로 접촉하고 주민들을 주체로 조직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단체중심의 연대를 하는 것은 결국 주민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기 쉽다. 그리고 지역에서의 활동은 주민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과 꾸준히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는 경험을 쌓아나가는 활동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주민을 주체로 바라보지 않으면 어렵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상황은 시민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주민들의 생활과 삶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어느 단체들과 연대하는 방식으로는 지역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너무 많다.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스스로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주민이 되지 않고서는 주민들을 만나기도 주민들을 주체로 조직화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런 접근법을 취했는데도 실패한 경우들도 많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주민들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주민들과의 최소한의 이해나 소통도 하지 못하는 ‘물(주민)과 기름(운동)처럼 떠 있는 활동’밖에는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로는 노동운동중심의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노동문제가 중심적인 관심사로 되고 있는 지역은 많지 않다. 도시지역의 경우에는 생활문제들이 관심사로 되고 있고, 실제로 지방자치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들도 복지, 환경, 교육, 문화, 성평등 등 생활문제들이다. 농촌지역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인구감소와 지역침체를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주민들의 관심은 이런데 있는데, 뜬금없는 구호나 의제를 외부에서 갖고 들어가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무상의료, 무상교육”같은 구호도 그 지역에 맞게 구체화되지 않으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구호를 내세우기 이전에 해야 하는 것은 그 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의료문제, 교육문제의 실태는 어떠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지역적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 고민들이 바탕이 될 때에만 대안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기존에 운동하면서 취해온 운동방식이 지역사회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우선 많은 지역에서는 활동의 중심이 여성들이 되고 있고, 여성들의 관심사에서 출발해야만 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여성들은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서도 수평적인 관계를 선호하며, 조직적 이해관계보다는 삶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운동방식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지역의 여성들에게 다가가기는 어려울 수 있다.

교육을 한번 하더라도 밤에 하면 지역의 여성들이 참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주로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는 생협이나 단체들의 교육시간, 회의시간은 주로 오전시간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이나 민주노동당의 교육에 초대를 받으면 대부분 시간대가 저녁시간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부분들은 사소한 차이인 것같지만, 반드시 사소하지 않은 차이일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 온 분들도 많이 느끼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정받는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다양한 진보적인 가치들을 몸으로 실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말보다는 실천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이다. 생태, 성평등,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몸에 익히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에서는 어려운 이론보다는 소박한 실천이 중요하다. 지역의 여성들, 주민들에게 어려운 말을 써서는 아무런 소통도 될 수 없다. 노동운동에게 익숙한 말들이 지역의 여성, 주민들에게는 생소한 말들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사실 지역에서 시민운동하는 분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재야운동, 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한 지역운동단체들이 지역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한 점들이다. 아마 노동운동이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방자치에 참여하려고 할 때에도 반드시 생각해 보면 좋을 것같다.

그리고 울산이나 창원 등의 노동자 밀집지역을 지역운동, 지역활동의 모델로 상정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울산이나 창원은 매우 특수한 지역일 뿐이다. 그 정도로 대규모 사업장들이 밀집해 있고, 그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지역에 밀집해서 사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다. 전국의 대다수 지역은 울산이나 창원과는 다른 상황이다. 노동운동이 지역사회, 지방자치에 관심을 가지려 한다면 보다 일반적인 활동모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울산이나 창원에서도 지금까지의 경과에 대해 평가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지역사회는 기본적으로 삶의 공간이다. 삶의 공간에서는 먹고 숨쉬고 자고 아이를 키우고, 기본적인 환경, 복지, 인권의 문제들이 실현되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관심사일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3. 좀더 구체적으로 고민했으면 하는 것들

한편 노동운동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지역과 밀접해 있는 조직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전교조나 공무원노조같은 경우에는 지역사회내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곧바로 지역 주민들과 직접 관련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의 지역활동이 지역이나 주민들과 밀착해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공무원노조의 노동3권보장이 지역주민들에게 공감되려면, 먼저 공무원노조가 지역사회, 지방자치를 바꾸는데에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투명행정, 책임행정을 만들고, 주민들이 지방자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해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공무원노조가 자율적인 연구모임을 만들든지 해서 연구도 해야 한다. 지역의 시민단체들과 상의하고, 필요할 때에는 행정적 지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야만 지역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만 공무원노조의 노동3권보장에도 주민들이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교조도 합법화이후 학교현장이나 지역사회에서의 활동은 미약했다고 본다. 지역에서 인권이나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단체, 모임들이 많이 생겼지만, 전교조 소속 조합원들이 얼마나 이런 단체, 모임들에 참여하고 소통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전교조 조합원들이 과연 학생들의 인권에, 지역청소년들의 인권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학교나 지역현장에서 그와 관련된 실천을 하는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에서 아동인권조례나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전교조가 참여하고 있고, 학생들의 인권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거나 전교조 전체 차원에서 확산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전교조가 지역에서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고, 학교내에서도 ‘인권과 평화가 존중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면, 그 활동 자체로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4. 글을 맺으며

얼마전에 어느 지역 활동가로부터 “(노동운동이) 왜 평소에는 지역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선거때가 되면 지역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지역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사실 선거때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선거 때에는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내에 뿌리를 내렸을 때에만 선거에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이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지역운동, 지역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를 바꾸는 힘을 만들어나갔으면 한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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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양대학교제3섹터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시민자치정책센터 운영위원으로 있는 정규호 박사님의 글입니다. 지난 2006년 7월 14일, 용인에서 있었던 '전국환경활동가 대회' 때 발표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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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문제와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



정규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환경운동단체들이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논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이 글의 주제는 오늘날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환경운동에서 왜 민주주의가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1.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 논란에 대하여

최근 몇 년 사이에 환경운동에 대한 ‘위기’ 담론이 무성하다. 위기에 대한 논의가 실체적 사실에 근거하든 인식론적 차원에서 제기되든 환경문제 자체의 위기적 현상들이 확대․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해결의 주체인 환경운동진영이 위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환경운동진영에만 해당되지 않고 시민운동 전반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7년 민주화 국면을 통해 양적, 질적으로 급속히 성장해온 우리나라 시민운동단체들이 최근 들어 시민사회로부터의 지지와 신뢰를 잃어가면서 그 위상과 역할이 급속히 약화되고 결국에는 위기 담론과 정체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과 기타 (개혁적)시민운동 진영이 당면한 어려움에는 공통의 배경이 있다.
즉 민주정부와 진보정당의 등장으로 시민운동진영의 개혁적 의제들이 행정과 정치 영역에서 일정 부분 수용되기 시작했고, 보수 진영에서도 시민단체를 만들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시민운동 진영의 사회적 영향력을 매개했던 언론 매체들이 이념적 갈등으로 분열되면서 환경운동을 비롯한 시민운동 진영의 목소리들을 균형 있게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변화된 현실이자 위기적 현상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면한 위기의 원인을 이러한 외적 환경의 변화로만 돌릴 수는 없다. 지난 10여 년 간 환경운동을 포함한 시민운동 단체들은 활동의 초점을 국가 차원의 정책적 과제에 맞추고 중앙권력의 구조 변화에 집중해 오면서 사회적 위상과 역할을 높여왔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메랑처럼 시민운동 위기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지난 시절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남겨놓은 정치, 제도적 관성이 강하게 남아있는 만큼, 국가정책과 중앙권력의 작동기제를 개혁, 변화시키기 위한 시민운동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운동에서 시민이 고객이 아니라 실질적 주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시민들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당면한 현실은 심각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경제의 세계화가 가져다 준 충격 속에서 시민(주민)들이 느끼는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개혁을 표방했던 진보세력과 그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 온 시민운동진영의 노력의 성과들은 시민들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운동진영이 당면한 정체성 문제는 시민운동 자체가 당면한 이러한 현실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환경운동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지속가능한 사회의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 ‘운동’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특히 유감스러운 것인 이러한 일들이 소위 ‘민주화’ 된 정권 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 환경운동의 정체성 위기 원인으로서 신개발주의 문제

환경운동의 정체성 위기와 관련하여 필자는 ‘신개발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환경운동진영에서도 익숙한 개념어가 되어 버린 신개발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선 등장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 근대화를 추동해 왔던 ‘개발독재’ 체제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재’는 청산했지만 ‘개발’주의는 민주화 된 국면 속에서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존속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으며,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신개발주의’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 민주화 이전의 ‘개발주의’와 민주화 이후의 ‘신개발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첫째, 작동 ‘환경’ 측면에서 신개발주의는 경제의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무한경쟁논리이자 지방화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기 위한 경쟁논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작동 ‘양식’ 측면에서 개발독재 시절의 개발주의와 달리 오늘날 신개발주의는 나름의 법적 절차와 제도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는 주목할 만한데, 신개발주의에는 효율과 성장을 기반으로 한 ‘개발주의’ 특성은 물론이고 합리성과 합법성을 기반으로 한 ‘제도주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기반으로 한 ‘전문가주의’의 특성들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개발주의가 교묘하게 결합된 이러한 신개발주의는 오늘날 환경운동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오늘날 환경운동은 신개발주의가 만들어 낸 ‘제도화의 덫’에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은 시민적 요구와 사회적 과제들이 제도영역의 정책결정과정에 수렴․반영되지 못할 때 시민들의 자구적, 변혁적 노력의 차원에서 목적의식적이고 가치지향적인 행위를 통해 등장한다. 환경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확대 과정을 통해 등장한 절차적 합리성과 합법성 요구가 개발주의와 결합하는 순간부터 환경운동은 딜레마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개발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제도화의 장벽에 가로막혀 희석되기 쉬우며, 환경운동에 대한 제도적 참여 기회가 과거 보다 확대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참여의 수준과 범위, 단계는 여전히 제한적이고, 그 결과 환경운동은 사후적으로 정책투쟁에 나서도록 만들고 있으며, 투쟁을 통해 발생한 사회적 갈등의 부작용을 오히려 환경운동진영이 부담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나아가 환경운동의 노력으로 정책변화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 성과는 환경운동 진영에 남지 않고 제도적으로 흡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제도영역에 있던 운동이 제도영역에 대한 참여기회와 수준을 높일수록 제도화과정의 속성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논리에 편입될 가능성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변화와 역동성을 기반으로 한 ‘운동’과 안정과 지속성을 기반으로 한 ‘제도’ 사이에 근본적인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신개발주의에 내재된 전문가주의 역시 환경운동진영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환경운동에 대한 주요한 비판논리 중 하나가 바로 ‘전문성에 기반한 대안제시 능력의 부족’이다. 하지만 ‘전문성’과 ‘대안제시’를 환경운동진영에 요구하는 논리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내재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이 확보하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과 이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하는 시민환경운동진영이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더구나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목표로 하는 개발정책에 대해 환경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미래가치, 생태가치와 같은 잠재적이고 장기적인 된 기대이익을 가지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결정에 대한 합당한 근거와 정보를 제시하고 대안을 탐색할 의무와 책임은 정책결정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하는 환경운동진영에 ‘합리적 대안제시’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다.
물론 환경운동 역시 규범적이고 당위론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시민(지역주민)들에게 만큼은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책임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책결정영역에서 충분하고 사전적인 정보 공개와 시민적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책무가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환경운동은 현재화 되거나 또는 예견된 문제 영역들을 이슈화, 여론화, 쟁점화 시킴과 동시에 문제 해결을 둘러싼 갈등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3. 신개발주의 시대의 민주주의 문제

언급한 바처럼 신개발주의가 만들어 낸 환경운동의 딜레마적 상황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국면을 거쳐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지금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형식적, 절차적 단계에 고착된 채 실질적 민주화의 단계로 심화되지 못한 생태에서 신개발주의가 남긴 제도화의 부작용이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발주의의 영향력이 강한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양식들은 오히려 환경운동의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현실 민주주의가 가지는 이러한 결함은 지난 수년간의 대규모 개발사업을 둘러싼 갈등과정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생태문제의 위기적 현상들이 가속화 되면서 생태계와 미래세대의 생존 권리를 강조하는 환경운동진영의 노력들이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지만 지금의 의사결정체계속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결국 환경 가치에 대한 현실 민주주의 제도의 무감각과 무능력, 무책임성 속에서 분배와 보존에 대한 요구는 ‘선성장’(先成長) 논리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도된 환경운동진영의 개발정책 저지를 위한 사법적 해결 노력 역시 현실의 법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혀 한계를 드러냈다. 새만금의 미래세대 소송과 천성산 도룡뇽 소송의 실패와 함께 결국 새만금과 천성산 개발사업 자체가 사법적 판결로 법적 정당성만 부여받게 되었다. 경주 방폐장 사례의 경우도 주민투표에 부여된 직접민주주의의 원리가 현실 속에서 제도적으로 왜곡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고민하는 진영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 속에서도 환경운동 측면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즉 기존의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시민(주민)들의 실질적 삶의 여건을 개선시키지 못했다는데 대한 비판 속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적(절차적) 민주화를 사회경제적(실질적) 민주화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자칫 향후 남은 민주화 과제가 경제문제로 환원된 ‘먹고사는 문제’로 연결될 경우 신개발주의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처럼 환경문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는 간단치 않다.
우리는 그동안 경험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에 있어 민주주의는 중요한 선결 요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왔다. 환경문제가 지닌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높은 반응성과 책임성은 결국 민주주의를 통한 개방된 사회에서 언론, 출판, 집회 등의 자유가 보장될 때 가능하며, 특히 정부나 기업의 활동을 감시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NGO들의 역할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점은 87년 이후 일련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경험해 온 바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운동은 민주화 이후 이루어져 온 일련의 정책결정 유형들과 환경운동과의 갈등에 대한 반응 양식들을 경험하면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라는 보다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현실의 대의민주주의는 1인(성인) 1표제에 기반한 평등성을 전재로 하고 있지만 이것이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동등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정보의 결핍과 이해당사자들의 욕구가 결합되어 생태학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신개발주의의 영향력이 강력한 상태에서 소위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은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강력히 묶이게 되고 경쟁적 관료기구에 의해 파편화됨으로써 환경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에 한계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나아가 현실 민주주의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시간’(time), ‘공간’(space), ‘종’(species)의 측면에서 생태학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토적 주권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 그리고 인간 이외 다른 형태의 생명존재들의 이해와 요구가 반영되는 것을 지금의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민주주의의 확장이 자동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금처럼 신개발주의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적 권리의 확장과 의사결정의 개방이 오히려 환경문제를 악화시키고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의 부문운동에서부터 지금의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환경운동이 맺어 온 민주주의와의 오랜 관계들에 대해 이제는 성찰적 진단이 필요하다. 환경운동은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한걸음 더 아나가 환경친화적 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녹색민주주의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기결정’의 원리는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환경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주의 과제와 21세기형 환경문제의 위기적 특성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오늘날 환경운동이 직면한 민주주의 과제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신개발주의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영향력을 환경적인 측면에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섬세한 진단과 접근이 필요하다. 신개발주의는 중층적인 권력구조를 통해 다차원적인 경로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신개발주의는 개발관련 업자와 관료를 포함한 ‘개발동맹’의 행위자들을 통해 작동할 뿐만 아니라(1차원적 권력), 보다 구조적으로는 개발 편향적인 법, 정책, 행정조직과 같은 ‘제도적 기제’를 통해 작동하고(2차원적 권력),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는 경제성장과 개발에 대한 가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양식’을 통해서도 작동하고 있다(3차원적 권력). 이중 제도화된 권력과 이데올로기화 된 권력의 작동은 매우 은밀하고 강력하다. 이점에서 그동안의 환경운동은 1차원적 권력의 작동에 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물교체(물갈이)’ 차원을 넘어 제도 변화와 가치와 문화적 양식의 변화로까지 운동의 영역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개발가치에 기반한 권력의 중층적 작동메카니즘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민주주의 민주화(급진화)’ 프로젝트는 환경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민주주의의 ‘복원’과 ‘확장’, ‘심화’를 위한 생태민주주의적 프로젝트를 모색할 때다.


4. 환경운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과제들

개인이든 조직이든 지나온 과정을 성찰하고 현재의 모습을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함에 있어 ‘정체성’은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점에서 환경운동의 정체성 확립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환경운동은 ‘내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스스로 기반하고 있는 이념과 가치를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활동의 내용과 방향, 전략을 구성함에 있어 환경운동진영이 기반하고 있는 이념과 가치는 아직 충분하게 성숙되고 분화되지 못하고 있다. ‘환경’ 자체의 가치와 특성에 대한 고민들은 많았으나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채택하고 있는 ‘운동’ 자체의 가치와 특성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여느 시민단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연대활동을 해 온 환경운동진영이지만 정부의 개발정책에 대한 ‘저항적 연대’가 중심이었고 단체 각각이 기반하고 있는 이념적 가치와 비전을 토대로 새로운 가능성 영역을 모색해 가는 ‘대안적 연대’의 경험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90년대와 달리 지금의 환경운동은 ‘환경의 중요성’과 ‘보존의 가치’를 당위론적으로 강조하는 단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관성적으로 이루어져 오던 연대의 방식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장기적 비전과 실천적 전망에 기반하여 스스로의 의미와 역할에 해답을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한편, 환경운동의 ‘외적’ 정체성 확립과 관련하여 환경운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연대를 강화하고 실천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환경운동이 지향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도구화 된 국가주의, 신화화 된 성장지표, 대상화 된 시민사회, 제도화 된 무책임성 등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풀어야 할 과제들은 복합적인 만큼, 여전히 추상화된 담론 영역에 머물러 있는 ‘지속가능한발전’, ‘순환형 사회’, ‘녹색국가’ 등에 대한 논의들을 현실의 실천 과제로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지역간 불균형으로 상대적 박탈감이 심한 상황에서 경제의 세계화가 가져다 준 충격과 불안감이 개발과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동맹의 영향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환경-노동-복지-보건-여성-평화-농업-교육’ 등 사회 각 영역간의 경계를 넘어선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며, 이 역시 사회변화에 대한 총체적이고 합의된 전망과 전략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또한 ‘환경보존은 곧 반(反)개발’ 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운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근본주의적 인식과 현실주의적 실천전략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다.
당면한 문제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선성장’(先成長)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문명론적 진단을 통해 ‘분배’와 ‘보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향과 과제들을 찾을 필요가 있다. 즉 지난 세기 근대화과정을 이끌어 왔던 ‘파이 키우기’ 전략이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키울 수 있는 파이의 ‘크기’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파이의 ‘질’도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경제가 어려워 졌다’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대해 ‘더 이상 썩은 파이를 키우고 나눠먹는데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분명한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환경과 노동, 복지, 보건 등 삶의 질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문제영역들 간의 긴밀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만들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시간’ 이라는 변수를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환경운동이 목표로 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실현함에 있어 경제, 사회, 환경, 제도적 지속가능성을 구성하는 ‘용량’(capacity)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의 파괴는 비가역적인데 반해 현실은 개발과 파괴의 규모와 속도가 보존과 복원의 규모와 속도를 여전히 압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환경운동진영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정체성 논란 속에서 환경운동 내외부로부터 부여되어 왔던 신뢰의 기반 역시 한번 훼손되면 회복하기 쉽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그저 낙관적으로 지켜보고 기다릴 수만은 없도록 만들고 있다. ‘위기라고 느낄 때 비로소 문제해결의 기회가 다가왔다’는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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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2005년 1월17일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운동할 때 버려야 할 몇 가지 아까운 것들"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

얼마 전 환경운동연합의 산하 단체인 에코생활협동조합(이하 에코생협)이 기업에 친환경공산품을 강매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KBS <9시 뉴스>가 한국수력원자력(주)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기업을 감시해야 할 환경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고 보도하자,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들이 분노했고 에코생협의 자유게시판에 비난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최열씨는 이사장직을 사퇴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 KBS가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걸러졌기에 분명히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미디어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재현방식’의 문제를 넘어서 현재 한국사회 ‘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시민단체와 기업 사이에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당위적인 목소리’를 넘어서 더 근본적인 고민 역시 필요하다.

일단 이번 일은 우연히 터진 사건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환경재단과 에코생협이 ‘환경이 건강이다’ 공개강연회를 열기 위해 기업의 협찬을 받는 게 옳은가?, 환경재단이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수익의 1만분의 1을 유치하는 ‘만분 클럽’을 추진하는 게 옳은가?(참고로 최열 총장은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기업을 1만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에코생협이 가장 불만을 느끼고 억울해 할 점은 이번 사건이 친환경공산품을 보급하려는 사회적(또는 생태적)으로 올바른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도 때문에 그런 판매방식이 더욱더 잘못되었다고 본다. “어떤 방식으로 보급했다”가 아니라 “몇 개를 팔았다”에 중심을 둔다면, 그 운동이 생태운동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은 ‘도구적 합리성’을 따르는 전형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은 생태적 사유가 가장 철저히 배격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과연 그 운동이 운동일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올바름만을 무기로 운동을 벌이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상대방은 온갖 술책을 쓰며 압박해오는데, 정당한 무기만을 들고 싸운다는 건 상당한 희생마저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과 힘듦,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기에, 그런 과정을 통해 이루는 작은 성과이기에 운동은 사회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효율적이고 빠른 목표 달성’은 아깝지만 버려야 할 대표적인 운동방식이다.

사실 위기의 근원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002년 에코생협이 출범할 당시, 이미 여러 생활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운동연합이 별도의 또 다른 단체를 만들며 운동을 ‘확장’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최열 총장 스스로도 YMCA를 예로 들며 “YMCA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사업구조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라며 “사업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운동조직이 사업조직의 악세서리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에코생협을 시작할 2002년도에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괜찮지만 남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남을 비판하는 잣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면죄부’ 또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또 운동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항상 그런 유혹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문어발식 확장’은 운동을 뿌리내리게 하고 내실(內實)을 찾는 데, 운동이 서로 연대하며 상승효과를 낳는데 치명적인 해악을 미친다(이번 일로 많은 단체들이 사회의 의심을 받는 동반하강효과를 누릴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발상 역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결국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아까운 것들을, 즉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방식이자 근본적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 사건은 최열씨의 이사장직 사퇴로 슬며시 정리되었다. 에코생협은 “이사장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자리이지만 생협사업상의 모든 활동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 책임을 지고 오늘자로 최 열 이사장은 이사장직을 사퇴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총대메기식 문제해결’ 역시 운동이 버려야 할 방식이 아니던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번 사건은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슬그머니 사건을 덮을 게 아니라 더 많은 얘기와 주장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30년 이상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이끌어온 요코다 카쓰미씨는 운동이 “국가정부에 의한 조작․지배의 실체를 간파하고 대항하는 힘을 단시일에 길러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그만 실력행사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고 전통적인 체제를 바꿔나가는’ 계기를 창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는 역할”(<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중에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동으로서의 생협’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을까?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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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4년 4월6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우리들의 리그'를 위해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

신문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텔레비전에 그놈들이 나온다면 이젠 부셔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정치 때문에 맘이 상해서 들이킨 술 때문에 루돌프 사슴코처럼 빨간 코가 되어버린 토끼씨, 이젠 정말 그놈들의 정치, ‘그들만의 리그’에 신물이 났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그놈들의 사진을 싸그리 떼어 밑닦개로 쓰고 싶었지만 똥꼬가 헐까봐 참아왔다. 답답한 맘에 술병을 기울여보지만 벌써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그동안 억눌러온 분노를 참지 못한 토끼씨, 드디어 작대기 하나를 떼고 과거의 모습인 도끼씨로 돌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네놈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마, 기세등등하게 현관을 나서던 도끼씨,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거리로 나가서 나는 무슨 말을 외치고 무엇을 위해 싸울 건가?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끼씨는 현관이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이다.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택하고 그 대표가 국민을 대변하며 정치를 한다. 지금 저 곳에서 멋대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국회의원들 역시 국민들이 뽑은 대표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탓하기 전에 그놈들을 뽑은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는 걸까? 그럼, 이 꿀꿀한 비극이 모두다 내 탓?

힘이 빠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도끼씨, 허망함에 눈물을 찔끔거리다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왜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야 할까? 왜 우리는 그 속에서만 미래를 봐야 할까? 정치는 진정 ‘그들의 공간’인 국회나 청와대, 정부종합청사에서만 가능한 걸까? 그 옛날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J. J. Rousseau가 말했듯이, 우리는 선거 때만 자유로울 뿐 나머지 시간엔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도끼씨는 여러분의 한 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중앙선관위 광고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우씨, 그래도 내가 한때는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도끼씨는 묵혀뒀던 책을 꺼내 읽으며 고민에 빠졌다. “시민들이 자신과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는 후보자를 발견할 수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대표자를 의회에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시민들은 적은 수의 후보자들 중에서 선출해야 하므로 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선거가 시민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상투적인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 p.74∼75)

맞아,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며 울며 겨자먹기로 맘에 차지 않는 인물에게 투표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리고 설혹 나를 대변한다고 여기는 인물을 뽑았다 치자. 그 사람이 국회로 들어가 내 의견을 충실하게 대변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비밀투표라 내가 그 사람을 뽑았음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안 들어주면 그만이잖아. 그러니 ‘철새’정치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거구. 게다가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말고 내가 그 사람을 통제할 장치가 없잖아. 한국에는 국민소환제도 없고. 그러면서도 나는 선거 때 투표하는 것만으로 ‘나의 정치’를 다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선거라는 ‘우리’에 갇혀 내가 진정 바라는 걸 까먹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나를 지배할 통치자를 ‘승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라면서 왜 우리는 한번도 스스로 지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고민에 빠진 도끼씨, 이제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리라 마음을 먹고 거리로 나섰다. 원래 정치의 장은 삐까번쩍한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가 아니었던가. 대학로엔 반전(反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한 목소리로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 정치가 자리잡을 곳은 바로 이곳이야. 도끼씨도 한 목소리로 반전을 외쳤다. “파병 반대, 전쟁 반대” 집회가 끝나고 대중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같이 발걸음을 떼던 도끼씨는 대열이 광화문에서 탄핵반대집회에 결합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했다. 거기 가서 무슨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거지? 지금 탄핵반대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일까? 불과 몇 달 전,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목을 매고 몸을 불태웠지만 정치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파병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 구체적인 정책에 관해 한 마디 논의도 없이 ‘민주 대 반민주’라니, 그건 그들만의 리그에 말려드는 게 아닐까? 주저하던 도끼씨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집회에서 목청을 높였던지라 노곤함이 밀려온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스르르 잠이 든 도끼씨, 꿈속에서 차를 갈아타니 고진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는 마을이장을 뽑기 위한 ‘추첨’이 있으니 빠지지 말고 모이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이장을 추첨으로 뽑는다고? 참, 희한한 마을도 다 있군. 도끼씨는 궁금한 마음에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정말 마을사람들이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도끼씨는 앞으로 가 회의를 주도하던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왜 제비뽑기로 이장을 뽑죠?”

그 사람은 별 당연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제비뽑기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입니다.”(『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p.133)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다. 제비뽑기로 뽑으면 어느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누가 권력을 잡을지 모르기 때문에 파벌을 만들거나 표를 매수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언제 자신이 뽑힐지 모르니 모든 사람이 항상 마을일에 관심을 가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이장이라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않을까? 그래서 물어보니 무조건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여러 명을 기명투표로 뽑고, 그 사람들이 제비를 뽑는다고 대답한다. 오호, ‘선거+추첨’이라,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네. 어떻게 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하게 됐을까?

도끼씨를 궁금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은 알겠다는 듯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얘기를 덧붙인다.

“우리도 예전에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지요. 선거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광분하기도 했고. 그때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제안했던 분이 이런 말을 했죠.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장치로서 상정한 국민투표는 필연적으로 인민을 배반하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투표에 의한 결정이 실패로 끝난 경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들 자신이자 ‘민의’ 자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포기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혹은 관료 조직에 판단과 결정을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성’에 의해 대의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대표자(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끝난다.”(같은 책, p.131) 듣고 보니 옳은 말이더라구요.”

그때 버스가 덜컹거려 도끼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쉬웠다, 더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광화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계속 차가 막혔다. 도끼씨는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는 분노는 참여하지 않는 냉소만큼 위험하다. 이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들의 리그’를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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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성공회대NGO자료관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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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포럼 2007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기획단 2차 사전워크샵

“한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 : 정영섭(사회진보연대)
발제 : 박하순(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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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지난 2006년 7월, 참여사회연구소가 창립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통해 발행한 자료입니다. 신진욱, 조희연, 전창환 선생들의 발제글 등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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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대선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도전과 비전제시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선거는 무릇 유권자들이 사회발전방향과 미래비전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는 공론의 장이며 민주주의의 축제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해나갈 새로운 정치를 고대하며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치현실은 국민의 요구와는 동떨어져 자신들의 권력욕만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과 대선 후보자들은 사회 발전방향에 대한 비전과 정책대안을 놓고 경쟁의 장을 만들어가기 보다 벌써부터 경선 혼탁과 과열, 정치공학을 앞세운 공방만을 일삼고 있다. 

또한 그들이 내놓은 대안은 한결 같이 시장만능주의를 앞세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구시대적 개발 중심의 성장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국민들이 원하는 일하기 좋은 나라, 교육받기 좋은 나라, 집걱정 없는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주지하듯이 우리사회는 지난 10여 년간 사회양극화가 가속화되고,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실업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 않는 가운데 극심한 차별 속에 신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900만에 달한다. 공교육이 몰락하면서 치솟는 사교육비에 학부모의 한숨이 깊어지고 지역과 소득에 따른 교육격차는 날로 커져 가고 있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집은 더 이상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닌 재테크의 수단이 되었고, 서민과 무주택자의 주거 불안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무분별한 개발 속에 국토는 파헤쳐져 생태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날로 커져가고 있다.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평등과 복지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군비확충에 쏟아붓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가고,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구축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이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는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에 역행하는 퇴행적 흐름에 대항하여 시민운동이 추구해온 경제민주화, 복지사회, 교육개혁, 녹색사회, 성평등사회, 평화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번 선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참다운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도록 할 것이다.  2007대선시민연대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모든 후보와 정당이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한 책임 있는 비전을 내놓고 국민에게 검증받는 정책선거를 만들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속의 사회양극화 심화, 생태적 위기, 교육불평등, 주거 불안, 복지 축소, 평화위협 등 삶의 질을 후퇴시키고, 사회 안정망을 위협하는 난국을 타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요구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 미래 비전과 핵심정책을 책임 있게 제안하고, 동시에 대선 후보의 정책과 공약을 엄밀하게 평가할 것이다. 삶의 질 향상에 역행하는 공약을 가려내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공약에 한해서는 이를 폐기하라는 운동을 펼칠 것이다. 

둘째, 후보자 중심의 선거가 아닌 유권자가 주인이 되는 선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집약하는 ‘아래로부터의 유권자 운동’의 전형을 창출하는데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시민들의 삶에 기반한 요구와 제안을 생생하게 집약하여 대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도록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생활현장의 평범한 시민들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사회적 약자, 풀뿌리단체들과의 연계를 도모할 것이다. 

셋째, 정치공학과 이합집산에만 골몰하는 정치권에 대해 적극적 비판을 제기하고, 건강한 정당정치와 선거 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우리는 선거과정을 감시하고, 대통령 후보의 리더십과 자질을 검증할 것이다.  또한 유권자의 선거참여를 가로막는 각종 제도적 장벽을 걷어내어 유권자의 참여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남은 4개월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한다. 대선시민연대는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염원을 모아 정치를 바꾸고, 선거를 바꿔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2007. 8. 30.

2007대선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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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8일부터 21일까지 3박 4일간
전북 군산대학교에서 개최된 [2007전국시민운동가대회]자료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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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전국시민운동가대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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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8일부터 21일까지 전라북도 군산에서 개최된 2007 시민.환경활동가대회의 결의문입니다.


2007 시민·환경활동가대회 결의문

우리 3백여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2007시민·환경운동가대회에 모여 ‘기찬 소통’을 주제로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사회를 만들자는 각오를 함께 나누었다. 우리는 새만금 방조제가 시작되는 이 곳 군산에 모여 민족의 길고 긴 고난의 역사에도 생명을 품어 온 고군산도의 절경이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마을마다, 전국 각지에서 시민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굳건히 뿌리 내리는 풀뿌리 시민운동의 성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활동가들은 시민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개발광풍을 소통과 연대의 정신으로 극복해 갈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밝힌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유권자의 축제, 서민 삶을 보살피는 정책운동으로 대응한다.

올해는 17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시민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가진 자 만을 위한 개발과 성장의 논리를 멈추게 하고, 지속가능한 개발과 시민권의 실질적인 보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도약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다.   이러한 때 우리사회 미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자 간의 합종연횡에 머물고, 구시대 개발주의자들의 향연장으로 전락하게 방치할 수는 없다.

우리 시민운동은 대통령 선거가 유권자의 목소리를 끌어 올려 정책에 반영되는 유권자 축제가 되고, 일자리 · 교육 · 보육 · 주택 등 모든 사회정책에 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이 마련되는 정책운동의 장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2007 대선 시민연대'를 출범시켜 활동할 것을 결의한다.

우리는 돌봄의 사회, 평화로운 대안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헌신할 것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성장만능주의, 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를 만들고 있다. 서민과 노동자는 무한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희생되어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다. 노동인구의 7할이 비정규직으로 노동할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며, 투지자본의 시장잠식은 시민권의 보호를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공성을 끊임없이 침해하고 사회 안정망에 구멍을 내고 있다.

우리는 사람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사려 깊은 정책, 촘촘한 사회 안전망, 좋은 일자리 창출, 돌봄의 노동이 실현되는 사회, 남녀노소 장애인 비장애인이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대안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최근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랜드 사태에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생존권 요구를 벌이는 이랜드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에 깊이 공감하며, 오로지 적대감으로 기업 사회 책임을 방기한 이랜드 그룹에 대해 상품 불매운동으로 강력히 항의할 것이다.

지역은 생명 평화의 산실이며, 미래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공공의 자산이다.

우리시대에 다시 써야 할 개발의 구상은 미래세대에게 삶의 숨결이 살아있는 공동체와 아름답게 가꾸어진 산천을 물려주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무차별한 개발로 지역이 죽어가고 있다.

유력한 대선주자는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자 최악의 환경재앙이 될 것이 뻔한  '경부운하' 건설 공약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수도권은 주택공급 100%가 넘어섰는데도 신도시 개발에 열을 올리고, 도로확장, 골프장 건설, 기업도시, 군사기지 이전 등 크고 작은 토목 건축, 개발사업이 지역경제를 살릴 길인 양 마구잡이로 추진되고 있다. 세계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며 환경보호를 제일 우선 과제로 삼아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게는 남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우리는 주민 공동체․ 생태계 파괴를 막아야 한다. 무분별한 개발광풍을 몰아내야 다가올 환경재앙을 막을 수 있으며, 시민사회의 근본을 다시 세우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  우리는 경부운하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해당 지역주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기 위한 「경부운하 대응을 위한 연석회의」를 구성하고자 한다.

-. 우리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생명과 평화의 섬’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설치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정부는 동북아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주도에 해군기기를 설치하려 지역주민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정부가 국책사업을 내세워 끊임없이 주민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더욱이 대형 해군기지 건설은 동북아 지역에서 군비경쟁을 확대시킬 뿐 평화체제와 안정화에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평화의 섬’ 제주도의 미래는 제주도민의 자유로운 토론과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덕유산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구성하자는 지역단체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며 참여와 연대의 마음을 모아 잘못된 사업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주는 지금 기업도시를 건설한다면서 천혜의 자원인 덕유산을 무참히 갈아엎으려 하고 있으며, 자치단체가 관광수입에 눈이 멀어 산천을 깍아 도로를 만들고, 부동산 투기를 부채질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북지역 최대의 현안인 새만금 지역에 대해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갈등이 지혜롭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새만금 지역의 생태계를 더 이상 희생시키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새만금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지역주민의 생존과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사려 깊게 살피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바람직한 지역발전의 모델이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생존의 터전을 잃고 고통하고 있는 이 때 기네스북에 등재하겠다는 둥의 황당무계한 논리로 추진되는 '새만금 락(樂)페스티발'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2007.  7. 21.
2007시민환경운동가대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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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민발전 대표로 있는 박승옥 님이 2007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진보논쟁이 한창일 때, 민주화운동에서 사회전환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요지의 짧은 글입니다.
초록정치연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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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운동은 집회·시위를 ‘잘’ 하고 있는가?
- 소통과 연대·지지와 활력 넘치는 집회·시위를 고민하다 -

* 필자 : 안진걸, 성공회대에서 '엔지오와 사회운동'을 가르치고 있으며, 진보개혁을위한청년세대네트워크(cafe.daum.net/moldream)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 들어가며

○ 집회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그런데 ‘비판과 성찰’이 담긴 글을 쓰려니 힘들게 집회·시위를 진행한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또 수많은 집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기획하기도 했던 필자가 쓰려니 쑥스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우리 시민·사회운동(이하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의 활성화(설득력을 높이기)를 위해서도, 사회운동의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서도 사회운동의 주요 활동 수단인 ‘집회·시위’에 대해서 이제는 광범위한 성찰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여 감히 글을 쓰게 됐다. 혹 반박을 받고 비판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토론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운동이 소통과 연대가 넘치는 집회·시위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 중학교 3학년 때인 87년에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처음으로 큰 집회에 참여해봤다. 그 후 고등학교 때는 광주에서 학교를 마치고 화순 집에 갈 때 ‘남총련(광주전남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시위로 차가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인지라 자연스럽게 내려서 걷다가 집회·시위에 참여했었다. 고등학생들이었지만, 그래도 좀 아는 것은 있어서 우리들은 80년 5월 광주시민 학살자인 노태우정권의 주구 파쇼경찰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광주·전남에선 당시에 시위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시위대를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그러다 대학생이 된 91년부터 2007년 4월까지는 본격적으로 ‘직업적 집회·시위 기획자 또는 참여자’로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크고 작은, 이런 저런 내용의 온갖 집회에 참여해왔다. 노태우 군사독재정권과 싸웠던 폭투(물리력을 동반한 가두시위)에서부터 10여명 안팎이 참여해 진행한 시민단체의 작은 피켓팅, 그리고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의 1인 시위까지... 기억에 남는 집회도 참 많다. 2003년 이라크 1차 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국회 본청 부근에서 기습시위를 했다 사지가 들려 닭장차에 끌려갔던 일, 2001년 핸드폰요금인하운동 도중 정보통신부 앞에서 기습 집회를 했는데 신고가 안됐다고 전경에 둘러싸일 뻔 했던 일, 더 거슬러 올라가 군복무 중 휴가기간에 참여했던 96년도의 연세대 집회(김영상 정권이 해산하려하는 학생들을 무리하게 가두고 강제진압하면서 벌어진 그 참상을 연세대 안에서 필자는 똑똑히 보았다), 95년 전두환·노태우 두 국민학살자·부정부패축재자를 구속시키기 위한 격렬 시위 등등

○ 집회·시위 참여인생 20년의 소회 속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시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있었기에 언론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 시민사회단체, 소수자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한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나마 그것이 공론화되어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올 수 있었다. 집회·시위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먼저, 집회·시위에게 절대 자유를 허하라.

○ 우리 사회운동의 집회·시위 문화를 성찰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최근 당국이 반FTA 집회를 불허한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이므로 강력히 비판받아야 한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원래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 찬성하는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하지만 반대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보장되어야 한다. 집회·시위가 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사회에서 균형 잡힌 토론·논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즉 경찰은 무언가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내용의 집회일수록 더더욱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지난날의 일부 폭력적 양상을 거론하며 무리하게 집회를 금지시켰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절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상태’라고 했다. 정부의 핵심 사업이다 해도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이 자유롭게 보장되는 사회의 상태가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경찰이 이를 무력화 시킨다면, 민주주의의 상태는 매우 나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 경찰들의 발표에도, 언론보도에도 보면 ‘불허(不許)’라고 표현하고 있다. 집회를 실제로는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처럼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규정(헌법 21조 2항)은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경찰과 언론들 스스로 ‘허가제’ 하에서의 용어인 ‘허용 또는 불허’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집회·시위에 대한 허가제나 자의적 금지는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하면, 이미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권력이 자연법적·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리고 집회·시위는 주최자들이 맘대로 하는 것이 맞다. 집회에 대한 평가나 그 영향에 대한 토론은 차치하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최근에 복면을 쓰는 행위 등을 금지한다는 집시법 개정안을 몇몇 국회의원들이 발의했는데, 이는 집회·시위의 기본도 모르는 자들의 폭거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집회·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외치고 싶은 내용을 위해 자신들의 택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동원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해골 분장을 하던(1인 시위 도중 해골 분장을 하던 시민이 연행돼 경범죄로 처벌받은 사례가 있다), 복면을 하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집회·시위 참여자·기획자들과 이를 바라보고 보도하는 시민·언론간의 ‘소통과 연대’의 문제이지 권력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자유의 범주에 이른바 폭력적 방법은 포함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 심지어는 폭력시위를 하더라도(이들이 실정법 위반에 대해 책임질 일인 것은 분명하고 필자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와 소통하고 연대하는 한 방식이 된 것이 ‘물리력을 동반한 시위’의 역사였다.  또 자연법적·헌법적 저항권에 의거한 저항의 폭력은 정당하다고 사법적으로도 인정된 바 있다. 다만, 그러한 특수한 저항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폭력적 시위’까지 포함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위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집회·시위 문제의 핵심은 더 많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문제임을 분명히 해둔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운동의 주요 수단인 집회·시위에 대해 우리 스스로 성찰이나 검토할 점이 없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3.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점에 대한 성찰과 대안

○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집회·시위의 어떤 점을 우리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인가? 지금부터 필자가 만난 ‘평범한’ 시민들과 필자가 함께 수업(엔지오와 사회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학생들이 현장 수업(집회)에 참여한 후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필자의 오랜 고민을 종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 제일 큰 문제점은 현재 사회운동이 집회·시위를 통해서 집회·시위의 주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닐까 싶다. 집회를 통해 주장을 널리 홍보하고, 그 주장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시민을 많이 늘려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때로는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부분 수구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운동의 집회·시위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경찰 당국의 최근 강경하고 무리한 대응은 국민 일반의 사회운동 집회·시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은 것이라는 분석은 매우 시사적이다.

○ 집회·시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론·토론장을 형성하는 일종의 공적 의사소통행위이다. 그런데 공론을 제대로 형성하지도, 의사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형태로 집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일군의 시민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가 집회 고유의 목적보다는 집회 참가자들의 만족(자족)과 결의를 드높이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그것도 집회 이유 중의 하나로서 존중받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집회에 감동이 없고 그 만큼 시민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지적을 유념해야 한다. 왜곡된 수구기득권 여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는 시민들을 만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런데, 이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시민들에게 나눠줄 인쇄 선전물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시민들의 관점에서, 또는 객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시 집회·시위에 대해서 거리감과 불만을 느끼는 요인들을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1) 집회·시위와 교통체증의 문제

○ 집회·시위의 역사와 현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집회·시위로 인해서 길이 막히는 문제일 것이다. 도로 위를 행진하는 것은 바로 교통체증으로 연결된다. 집회의 경우도 넓은 공원이나 광장, 길(인도) 한쪽에서 진행 하는 방안이 있지만 아예 도로 위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구보수 언론은 집회·시위의 내용과 의의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고 ‘길이 얼마나 막혔으며, 그로 인해 시민이 큰 불편을 겪었다’는 식으로만 보도함으로서 집회 참가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혈안이 돼있다. 한편, 도로 위의 시위나 집회 때문에 차가 막히는 경우 당사자인 시민들 대부분은 매우 불편해하고 짜증스러워 한다. 시민들은 집회·시위를 하면서 꼭 도로 위에서 행사를 하고 도로 위를 행진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민주사회에서 누구나 집회·시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철학적’ 논리는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도로 사정(항시적인 교통체증과 우회 도로의 부족 등)이 안 좋아 집회·시위대가 비판을 덤터기로 쓰는(과도하게 혼나는)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

○ 원칙적으로 집회·시위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방안까지 우리 국민인 주최자·참여자들이 결정할 문제이기에, 길을 막고 행진하는 것 역시 자연법·헌법적으로 보장된 행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설령 타인이 좀 불편하고 사회적 비용이 든다 해도 절박한 누군가가 외치고, 그 내용을 널리 알리고, 때로는 위력을 보여줌으로서 사회에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영향을 끼치고 소통하게끔 하는 시위를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 헌법과 집시법의 취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권리를 일부 침해할 소지가 있고 사회적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 도로 행진의 경우, 집시법에서 금지했을 텐데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민(民)이 하는 집회·시위 외에도 많은 행사가 도로 위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관(官)이 하는 행사는 도로 위에서도 보장하고 민이 하는 행사는 금지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수다스러우며, 또 비용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누구라도 자기 이야기를 편하고, 맘 놓게 할 수 있는 사회가 국민주권·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어떠한 법·제도·정책 등으로 인해서 불만이 있는 시민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공간마저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 시민들은 결국 누적된 불만을 매우 파괴적으로 표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누구라도 자기의 이야기를 맘 놓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집회·시위로 이것이 그나마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길이 막혀서 고생하는 시민들도 이런 점은 깊이 헤아려주어야 한다. 또 언젠가 길 막힌 당사자도 길을 막고서라도 시위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도로 위 행사나 행진을 ‘관성’처럼 진행한다면, 그래서 길이 막힌 당사자나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짜증이 민주사회의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범위)나 연대 범위를 넘어설 정도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이 수구언론과 민주주의를 좀먹는 수구적 모략가들로 인한 인식일지라도 시민사회운동이 깊이 반성해볼 수밖에 없다. 사실 집회·시위 중에 가장 좋은 형태는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다. 어떤 국민에게도 반감을 주지 않고, 맘껏 우리의 주장을 널리 홍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집회·시위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그렇게 배려하고 주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1-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애초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가급적이면 도로 위를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보자. 예를 들어, 대학로 도로 위에서 집회·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 그 일대 상인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로니에 공원에서 할 수 있는 집회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 이상의 인원이 모일 것 같은 집회는 더 큰 공원이나 광장을 찾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집회를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 어떤 공원은 시민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문제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장충단 공원은 마로니에 공원이나 대학로 도로 위보다 시민들이 많지 않다. 이처럼 시민들의 인적이 많지 않은 집회 장소인 경우는, 집회 장소 부근 시민들이 많은 곳에 인쇄 선전물을 잘 배포하는 것을 병행해면 될 것이다.

○ 이것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경찰 당국도 광장·공원에서의 집회 신고를 절대적으로 신고 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위대가 애초부터 많거나 늘어난 경우라도(광장·공원의 경우는 웬만하면 다 포용한다) 도로를 사용하게 되는 일이 원천적으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찰 당국은 지금도 광장·공원에서의 집회마저도 종종 불허하는 만용과 권력 남용을 벌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좁은 인도 위나 상대적으로 좁은 장소에서 집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시위대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도로 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야 만다. 이처럼 집회·시위에서 벌어지는 상당수 문제는 경찰 당국의 무리한 대응이 초래한 경우가 많다. 또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또는 집회에 과잉 대응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동원한 각종 진압 장비(닭장차, 물대포, 경찰차 등등)가 도로를 점거해 길을 막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마저도 집회·시위대의 책임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부당하다. 경찰 당국의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예 진압장비나 차량이 출동하지 않으면 충돌도 벌어질 일이 없고 교통체증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 대규모 인원 참여가 예상되어 불가피하게 도로 위에 집회 신고를 한 경우도, 참여 인원이 예상보다 적을 때는 가능한 인도 상으로 이동하거나 한쪽 차선으로 최대한 좁혀서 집회를 진행할 수도 있다.(집회 주최자들의 유연하고 기민한 판단이 중요하다) 또 도로 위 행진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 꼭 행진을 해야 해서 집회 후 두 개 차선으로 행진한다고 신고했다고 하더라도 참가자 규모에 맞게 탄력적으로 1개 차선으로만 행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인원이 너무 많아 두·세 개 이상의 차선을 행진할 수밖에 없더라도 길게 늘어뜨려 1차선으로만 행진하려는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차량 막힘도 최소화하고 널리 늘어뜨려서 접촉·홍보할 수 있는 시민들도 늘어나는 1석2조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규모 인원이 아니라면 인도를 따라 행진하는 것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의 통행에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면, 때로는 한·두 줄로만 서서 길게 늘어뜨려서 걷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피켓을 들고(홍보도 많이 될 것이다) 쭉 행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진풍경으로 주변 시민들도 시위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이런 경우 인도로 행진할 때는 깃발을 내려 주변 시민들의 통행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깃발을 늘, 높이 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2) 우리들의 집회·시위에 감동이 있는가?

○ 집회에 감동이 부족하다. 굉장히 천편일률적인 모습이다. 큰 단상이 있고 깃발이 있고 단체티를 입은 참가자들이 군데군데 있다. 주로 ‘*** 의장님’ ‘***대표님’이라는 분들이 연달아 목소리 높여 연설을 한다. 구호를 외친다. 집회 중간에 문화공연이 있긴 한데, 운동권 가수 중심의 공연이 펼쳐진다. 여기엔 보통의 시민들이 들어갈 틈이 없다. 평범한 시민들도 말할 공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공간은 없다. 미선·효순 추모 촛불시위처럼 보통의 시민들이 함께 할 만 한 무언가가 없다.

○ 예전에 집회를 준비하던 선배들은 집회를 막으러 온 경찰, 전경마저 감동시키려 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부여잡던 그 무엇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때는 구호도 ‘민주시민 동참하라’였다. 그러나 지금 ‘민주시민 동참하라’는 구호는 거의 외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심지어 집회 참가자들도 집회를 따분해 한다. 형식적으로 앉아있고, 참가자들끼리 사적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집회장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참가자들마저도 지루해하고 따분해하는 집회에서 어떤 지나가는 시민이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 집회 시간이 너무 길다. 그만큼 길이 막히거나 통행이 번거러운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도 힘들어한다. 발언 내용도 비슷한데 연사가 너무 많이 나온다. 또 내빈 소개가 너무 많다. 그들도 한 시민으로 참여한 것인데,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소개할 필요가 꼭 있을까. 보통의 참가자들이나 시민들을 너무 객체화시키는 것 아닌가싶다.

○ 집회장의 언어가 너무 거칠고, 결의가 높은 사람들 위주의 발언 일색이다. 고민하고 잘 모르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연설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리고 운동권 사투리(운동권 전문용어)가 남발된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얼굴을 고개를 갸우뚱 하거나 얼굴을 찌푸린다. 구호는 늘 ‘촉구·촉구·촉구한다’는 삼창 식이다. 구호도 좀 더 쉽고, 때로는 부드럽게 외칠 수도 있어야 한다. 또 일반 시민들도 함께 외치고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도 고민해야 한다.

2-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집회 시간을 가능한 만큼 줄인다. 발언 연사들도 가급적이면 줄인다. 또한 발언자 중에 평범한 시민, 젊은이들을 많이 포함시킨다. 운동권식 고성 연설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일반 시민들의 평범한 호소가 더 큰 감동이나 울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자유발언대’를 두어 누구라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간도 보장한다. 운동권들만 참여하는 집회가 집회의 참 목적은 아니지 않았던가. 운동권 노래가 아니어도 좋으니 문화공연을 잘 배치하자. 시 낭송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얼마 전 고 허세욱 선생 추모집회에서 있었던 송경동 시인의 ‘별나라로 간 택시 아저씨’ 시 낭송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고 평가들 한다.

○ 분노를 거친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서 분노가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하지 않는가. 운동권 사투리나 전문용어는 우리들끼리 있을 때나 사용해야지(그것도 문제지만) 대중 집회에서, 열린 공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제발 쉬운 표현, 시민들의 언어로 집회를 진행하자. 결의를 드높이고, 결의를 보여주는 것도 좋다. 그것도 집회·시위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이 사람들의 동의를 넓혀가는 것이라면, 지나가는 시민, 지켜보는 시민들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단 한사람의 동조자라도 넓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보통은 쓰지 않는 말, 살벌한 말들도(군사독재와 싸우다 보니 군사용어도 많이 남아 있다) 성찰해보자. 결의, 결사, 투쟁, 진군, 진영, 진지, 타도, 동지, 총화, 선전전, 조직화, 보위... 그 자체로 모두 의미 있는 단어들이지만 시민들에겐 생소하고 부담스러운 단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통의 시민들은 ‘동지’라는 말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지나가는 시민여러분, 저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입장이 서지 않은 시민들이나 참가자들의 경우 ‘동지’라는 말이 얼마나 생경하겠는가. 편하고 부담 없는 용어로 일부 맹렬 참가자들이 아닌 사람들과 주변 시민들을 배려했으면 한다.(필자도 투쟁이나 동지라는 말을 경우에 따라서는 쓴다. 다만, 그런 말마저도 시민들과의 소통에 장애가 될 소지는 없는지 검토해보자는 취지이다) 최대한 부드럽고 쉬운 용어를, 보통 시민들의 언어를 사용해보자. 구호도 평어·촉구형 구호만 있다. 때로는 호소·존대형 구호도 외칠 수 있고, 아예 구호를 말로 대신할 수도 있다. 소리 높여 연설하고 촉구 구호하고... 이런 전형도 깰 수 있어야 한다.

○ 극우단체들의 집회에서는 없는 품격을 갖추자. 최근 극우단체들의 집회 가보면 온갖 욕설과 극언이 난무한다. 사회운동은 이른바 ‘지배계급’을 비난할 때도 갖출 수 있는 예의나 품격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거칠고 극단적인 언어가 횡행하는 집회에서 분노가 일정하게 표출되고 전달되는 기능이 있겠지만 보통의 시민들과 경찰, 취재 기자들까지 감동시키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주변의 그들마저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품격이나 예의 등도 고민해보자. 그렇게 투쟁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물론, 분노가 절망이 너무 큰 집회에서 점잖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때론 무리가 있겠지만.

3) 보통시민은 깃발에서 큰 거리감을 느낀다.

○ 집회장에 가보면 수십·수백 개의 깃발이 집회장을 ‘커버’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보통 시민들이 느끼는 거리감이 시작된다. 집회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동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역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오랜 문제제기다. 그러나 깃발은 여전히 집회장을 뒤덮고 있다. 집회가 참가자들의 만족과 결의를 높이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의 또 다른 반증일 것이다. 어떤 대학, 어떤 노조, 어떤 진보정당이 참가했다거나 많이 왔다(조직력 과시)는 표현이고 시위인데, 그것이 전체 집회 대오에서 그리고 집회의 목적에서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 깃발 위주의 집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즉 조직 대중들만의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깃발 때문에 집회에 거리감을 느끼는 시민들, 심지어 집회를 가고 싶어도 깃발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못 갔다는 시민들(자신이 속한 단체가 없는 시민들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민망해서 자리를 빨리 떴다고도 한다)이 있음에도 깃발을 내리지 않는다.(이 황망한 시대, 좋은 가치를 지향하며 운동하는 단체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깃발로 표현하는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집회는 열린 공간이고 공론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조직 대중들도 편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책임을 ‘깃발’에만 돌릴 수는 없지만, ‘넘치는 깃발’이 ‘조직 대중들만’의 집회의 ‘상징’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요즘 집회에 가보면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대학생(한총련, 좌파), 사회당, 다함께, 청년단체 등등의 깃발이 완전 대세다. 어쩐지 그런 집회에 일반 시민들이 낄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애써서 참여한 그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일반 시민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집회의 정식으로 굳어져야 되겠는가.

3-1) 이렇게 고민해보자.

○ 깃발을 아예 안가지고 오면 어떨까. 그런 상상까지 해봐야 한다. 깃발이 대중의 분노를 높이고, 시민들의 동참을 높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우호·중립 대중의 참여마저도 가로 막는다면, 아예 안가지고 나오는 게 상책일 수 있다. 참가자들의 소속감을 높이고, 단체의 참가를 홍보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 수많은 대중 중에 소속 회원들이 모여들기 편하게 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단체 이름이 적힌 손 피켓이나 작은 손 깃발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손 피켓, 손 깃발, 그리고 단체 이름이 적힌 구호 피켓 정도여도 단체의 참가 여부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집회장 부근에 단체의 간이부스를 만들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단체 홍보물도 나누어주는 등 널리 단체를 홍보하는 방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은책’ 출판사는 하나의 단체처럼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늘 부스를 차리고 홍보에 열심이다.

○ 언론 보도에서 집회장의 모습은 늘 깃발이 차지하고 있다. 국민들에겐 늘 조직대중의 집회로만 비춰진다. 그만큼 울림이 적다. “매번 하던 그놈들이 또 데모 한다”는 핀잔과 조롱을 듣기까지 한다. 깃발을 내린다고 해서 투쟁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깃발과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단체 복장이다. 단결 투쟁이라고 적인 붉은 조끼를 집단적으로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참가자들의 유대감과 결의는 높아지겠지만) 지나가는 이들이 부담감을 느끼고, 조직대중이 아닌 시민들에겐 거리감을 유발한다. 사내나 특정 지역에서 하는 집회나 ‘*** 한마당’ 식의 단합대회형 집회가 아니고 열린 공간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집회라면 굳이 ‘조직대중’의 상징인 단체조끼를 입고 나올 필요가 있을까. 물론 어떤 단위의 집단적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있다.

4) 전경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 집회에 참가하고 해산하는 과정, 집회 후 행진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도 종종 크고 작은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이 경우 대부분은 경찰 측의 무리한 참가자 압박이나 행진 봉쇄가 그 이유이겠지만, 우리들이 성찰할 몫도 적지 않다. 집회 주최 측에서 충돌을 적극적으로 예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집회 참가자들이 거의 관성적으로 전경과 충돌하는 경우도 일부 발생한다.

○ 충돌이 빚어지면 다치는 것은 대부분 비무장한 시위대들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고 또 억울한 일인가.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물리적 충돌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집회를 무리하게 봉쇄하고, 합법적인 행진을 방해해서 벌어지는 충돌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다만, 예를 들어 1차선으로 행진하기로 신고했는데, 인원이 좀 늘어났다고 2차선으로 행진을 시도한다든지 하면서 벌어지는 충돌 같은 경우는 시위대에서 사전에 통제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한 차선으로는 도저히 행진이 안 될 정도로 인원이 많다면, 그것은 길게 늘어뜨리는 행진으로 하면 된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경을 밀어내고 한 차선 더 확보했다고 해서 승리감을 느끼고 환호성을 지르는 일이 있는데, 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 과정에서 전경, 경찰, 차 막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반감을 우리는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친 시위대의 아픔은 누가 책임지는가.

4-1) 이렇게 고민해보자.

○ 공권력의 집회 탄압으로 인한 ‘저항적 폭력’이 아니라면 모든 집회·시위에서 폭력은 철저히 방지되어야 한다. 경찰의 물리적 폭력에 맞선 저항적 폭투(폭력 투쟁)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너무 커 애초부터 폭투를 준비했다면... 이는 국민이 판단할 몫이리라. 집회 시작하기 전, 집회 도중, 집회 후 이 모든 과정에서 집회 주최 측과 경찰 간에 이른바 ‘핫라인’을 통해 모든 것을(특히, 폭력적 상황) 합리적으로 조정(통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또 대부분의 충돌이 경찰 당국의 무리한 집회 봉쇄나 참가자 통제, 합법 행진까지 가로막는 무리수에서 발생하므로 경찰 당국의 유연한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경찰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경찰이 배치되지 않으면 충돌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지 않겠는가.

○ 시위대 역시 충돌을 절대적으로 피하기 위한 인내와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전경과의 충돌처럼 슬픈 일이 없다. 군복무 중인 젊은 전투경찰(의무경찰)도 다치고, 시위대도 다치고... 이런 일을 피하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일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이를 막기 위해 집회 주최 측의 의지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다만, 정책 당국에 더 가까이, 더 많은 항의를 전달하고 싶은 절박한 경우인데, 경찰이 이를 가로막아 벌어지는 충돌의 일정한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마저도 최대한 몸싸움을 피하고 연좌·연와식의 비폭력적 항의를 진행한다면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 평화와 인권을 위해 실천하는 우리들이, 피할 수도 있는 폭력과 인권침해(전경에게 쓸 데 없이 욕을 해대고 분노를 전달하는)를 야기하다면 이는 우리 운동의 ‘수준’과 ‘철학’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폭력과 욕설이 터져 나오는 시위의 설득력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도 곱씹어봐야 한다.

5) 소음(엄청난 소음)성 집회에 대하여

○ 일부 집회의 경우 도심 한복판, 주택가 주변, 심지어는 학교가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음향으로 집회를 한다. 물론, 집회 참여자가 많아서 그러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집회 참여자에 비해 너무 큰 음향은 문제가 있다.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엄청나게 큰 음향으로 집회를 진행하고, 노래나 녹음된 육성을 틀어놓기도 한다. 홍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참가자에 비해 큰 음향, 그리고 장시간 음향 집회는 지지는커녕 반감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적어도 이런 점들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집회의 상대방에게 타격과 고충을 줘 문제 해결을 앞당기기 위한 고육지책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변 시민들의 입장도 고려해 유연하게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학교 주변에서는 삼가고, 노동탄압을 일삼는 한 회사 앞에서 종일 항의집회를 하는 경우라도 음성을 키우는 경우는 주변 사무실의 업무에 방해가 안 되게 점심 때 진행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5-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소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짜증과 심지어 질병까지 야기한다. 이런 부분들을 철저히 주의해야 한다. 먼저, 집회참여자의 숫자와 어울리는 만큼의 음향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집회를 시작하기 전 대열의 맨 끝 참여자가 무대 진행자의 음성이 들리는 지 여부를 확인해 안 들리지 않을 만큼 음향 크기를 조정(하향)하는 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

○ 참가자는 적은데, 음향만 엄청 틀어놓은 경우는 지양하자. 집회 상대방에게 타격과 고충을 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제한적으로만 그 방법을 사용하자. 소음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의외로 크다는 것을 각인하자.

6) 기타 집회·시위에서 문제가 되는 점

○ 화형식은 신중해야 한다.

화형식은 집회 말미에 집회의 목적과 참가자들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종종 배치된다. 화형식 할 때는 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결의를 높이고, 참가자들의 분노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퍼포먼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폭발성’에 주목해 가급적이면 화형식을 신중하게 배치해야 한다. 특히 사람의 모형을 불태우는 경우가 있는데, 사회운동의 생명 존중과 평화, 인간해방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화형식 그 자체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함께 화형을 할 때 그 대상이 사람의 모형인 경우는 피하는 게 좋겠다.

○ 집회하면서 술은 안 먹었으면 좋겠다.

분노가 너무 크고, 절망이 깊어 집회 시작 전에 소주 한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로 농민·노동자대회 때, 특히 추운 겨울 집회 때 몸을 녹이기 위해 소주가 가끔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회를 하기전이든, 하면서든 술을 먹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차라리 집회가 끝나고 기분 좋게 또는 뜨거운 분노로 술을 한잔 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술 먹고 하는 집회의 경우,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오히려 반감만 살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꾸중을 들을 일이다.

○ 집회 후 청소가 제대로 안 된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행진 등의 이유로 떠난 후 집회장의 지저분한 모습을 수구 언론이 찍어 얼마나 공격을 해대는가. 시민들도 그것을 보고 실망하고 있다. 우리가 어지럽히고, 다른 민중들이 힘겹게 치우고... 이건 아니다. 집회 후 청소만큼은 제대로 해서 누구도 실망시키지 말자.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말자.

7) 집회·시위를 더 잘해보기 위한 고민 몇 가지

○ 집회를 축제처럼 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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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상반기 시민과세계 제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한국의 시민운동, 정말 '시민없는 시민운동'인가?
- '시민없는 시민운동'론의 문제점과 시민단체의 재정문제에 대한 검토 -

하승수

1. 기정사실화된 '시민없는 시민운동'

'시민없는 시민운동'. 이 말은 언론이나 보수적 지식인들이 한국 시민운동을 비판할 때에 항상 사용하는 말이다. 어쩌면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한국 시민운동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판'일 지도 모른다. 본래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말은 시민운동가들이 시민참여가 부족한 시민운동의 현실을 자기비판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회원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좀더 활성화시키자는 선의(善意)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이 이제 시민운동을 겨누는 창끝이 되어 있다. 이미 이 말의 기원과는 무관하게 '시민없는 시민운동'은 시민운동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이 말은 너무 많이 사용되다보니 한국의 시민운동은 '시민없는 시민운동'인 것처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인식되고 있다. 국내 최대의 환경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이 최근 사무총장을 회원직선제로 뽑겠다고 발표했을 때에도, '시민없는 시민운동'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소개되었을 만큼, 이제 한국의 시민운동에게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 것같다. 그러나 정말 한국의 시민운동은 '시민없는 시민운동'인가?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이 오래된 만큼, 그 비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많은 단체들이 회원수를 확대하고 회비납부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내부의사결정구조를 민주화하고, 회원들의 참여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하는 단체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시민운동이 이제 중앙에 있는 몇몇 단체가 주도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에서, 그리고 복지, 인권,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작은 시민단체들이 있다. 이들에게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을 하는 것이 온당한가?
필자는 이제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적극적인 반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시민없는 관변단체', '시민없는 정당', '시민들을 무시하는 언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의 근거를 제공해 온 시민운동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해 시민운동이 스스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역에서 언론플레이와는 무관하게 일하고 있고, 스타도 없으며, 재정도 주로 회원들의 부담으로 해결해 나가면서 활동하고 있는 작은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은 참으로 생뚱맞은 비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소위 '중앙시민단체'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부 의사결정시스템이 민주화되어 있지 않고, 언론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자기 단체가 '시민운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앙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스스로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고 자인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회원이 몇천명, 몇만명인 단체가 '시민없는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단체에 회비를 내고 있는 회원은 도대체 무슨 존재란 말인가?

이 글에서는 부족하나마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점을 살펴보고, 시민단체의 재정문제를 중심으로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이 가진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란 부당한 비판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겠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하 생략 - 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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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교육 미래만들기 워크샵

지금, 시민운동에는 어떤, 시민교육이 필요한가?

기 간 : 2003년 7월25일(금) -26일(토)
장 소 : 동양인재개발원
주 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 관 : 민주시민교육포럼

프로그램

◎ 문제제기

1. 시민교육의 현재 "2002년 민주시민교육 기초조사사업을 토대로" (한숭희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2. 시민운동과 시민교육 - 정선애 (함께하는 시민행동 인터넷 시민학교 사무국장)

◎ 시민교육의 새로운 모색

1. 이슈중심의 운동에서 시민교육

<사례발표>
고양시 고봉산 살리기 운동 : 김미영 (고양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
지정토론 : 이인현 (고양 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문홍빈 ( YMCA 전국연맹 )

2. 지역 시설에서의 시민교육

<사례발표>
주민자치센터 시민교육 프로그램 : 조재학 (열린사회시민연합 사무처장)
지정토론 - 양병찬 (공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정희선 (서초구 자원봉사센터 소장)

3. 법.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교육

<사례발표>
학교 급식조례제정 사례 : 전종덕 (민주노동당 전라남도 의원)
지정 토론 - 김범수 (고양시 의원)
김기현 (부천 YMCA 정책부장)

4. 지역사회 공동체 교육

<사례발표>
생협 운동에서의 교육 : 여성민우회 김김희정 (동북 여성민우회 사무국장)
지정 토론 - 이경란 (마포 두레 생협 교육이사)
이영이 (광명YMCA 총무)

◎ 종합토론 및 과제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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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의 시민사회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안소현, 2000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일반사회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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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12일(목)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 주최로 개최된 제1차 동서정책포럼 [시민운동, 이대로 좋은가?]의 하승창(함께하는시민행동) 발표문입니다.

시민운동 10년이 낳은 문제,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극복을 위한 작은 생각

1. 한국 시민운동의 성장
2. 시민운동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읽어내기
1) 백화점식운동
2) 언론플레이중심
3) 재정의 정부의존.
4) 시민없는 시민운동

3. 또 다른 변화와 시민운동
4. 여전히 꿈을 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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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 정보사회의 특징
2. 현실 정보사회와 시민운동: 과제
3. 현실 정보사회와 시민운동 : 방식

홍성태(상지대 사회학과) 교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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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1987년 이후 한국 시민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분석하는 데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 시민사회는 급속히 성장해 왔으며, 이런 성장 가운데 주목할 것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와 전자적 공공영역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가족주의와 권위주의의 시민문화는 시민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서구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와 갈등해 왔다. 그 결과 시민사회의 구도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이런 특징들을 주목해 볼 때 한국의 시민사회는 전통과 현대, 경쟁과 연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가 공존하는 '이중적 시민사회'라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이러한 이중성은 현재 시민단체의 전략은 물론 시민운동의 정치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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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5월,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개최한 학술세미나 자료입니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시민사회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렸고, 이신행, 고상두, 이진원 선생 등의 발제글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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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협력은 어디쯤?-“푸른경기21실천협의회”를 찾아
인터뷰 : 유문종 사무처장(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제한된 행정부의 인원만으로 복잡한 지방자치단체의 살림은 꾸려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 영역별로 파트너가 있기 마련이다. 전문가 집단일 수도 있고, 경제인이 될 수도 있고, 관변단체나 시민단체가 될 수도 있다. 각종 이익집단이나 개발업자, 지역의 토호세력들도 어떻게 보면 공생을 위한 조건으로 서로 파트너를 형성하기도 한다. 행정부의 필요에 의해서, 또는 각 집단들의 필요에 의해서 얼기설기 파트너 관계망이 중앙 못지않게 지역에서도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파트너십은 행정부가 정책을 입안할 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곤 한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파트너십이라면 몰라도,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유지되는 파트너십 관계는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지저분한 뒷거래가 드러날 때도 있다. 그래서 시민들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잘못된 정책이 횡횡함으로써 시민의 혈세가 바닥에 뿌려지기도 한다. 잘못된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지방자치를 좀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식적이고 공개적이며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파트너십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민관협력기구로 불리는 ‘지방의제21’사업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92년, 유엔이 권고한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협의회를 구성하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0여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지방의제21 사업은 파행을 겪었던 몇 몇 지역을 제외하고 한국적 의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한국적’이라는 평가 잣대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과 다른 한국식의 모델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식 모델의 현재적 좌표는 어디일까? 행정부의 입장에서, 또 민간단체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일 수도 있고, 지역에 따라 평가의 지점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정답을 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협의기구를 통해 행정과 민간의 거리 폭을 줄였다는데 커다란 이견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제는 단체장이 바뀌거나 담당 공무원이 바뀐다고 해서 의제의 경로가 확 바뀌는 체제는 아닌 듯싶다. 그래서 지방의제21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이런 시점에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의 유문종 사무처장을 만났다. 유문종 사무처장은 오랫동안 지방의제 사업에 관여해왔고 누구보다 이 사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활동가 중에 한 명이다. 그가 최근 고민하고 있는 부분,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단,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푸른경기가 98년도부터 해서 99년도에 시범사업을 발표했죠. 그리고 제 기억에는 99년도 6월 5일에 아마 푸른경기21이 선포됐을 거예요. 그 때 1월 달부터 한참 서둘러서 의제 만들고, 8개 분야로 만들었죠. 6월 환경의 날 전후로 선포한 것으로 기억하고, 당시 저는 수원의제21에서 경기의제 참여를 했죠.......뭐 여러 가지 면에서 경기도가 한국의 지방의제21을 선도하고 있다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지방자치단체 규모도 그렇고요, 인구도 그렇고, 31개 기초지자체를 거느리고 있는 곳이, 서울이 25개인가요, 경북이 23개인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전남이 18개, 이렇게 경기도가 가지고 있는 규모가 있는 것 같고요. 또 규모도 규모지만 지방의제21의 추진 속도나 활동 내용을 보면 굉장히 왕성하고요. 대부분 경상남북도나 전남을 보면 지방의제21 보고서를 만들고 그냥 끝낼 필요가 있는 상태인데 지금 다시 끄집어내서 추진기구도 만들고 조례도 만들고 이런 흐름이 있는데 경기도는 시작부터 경기도 시군들이 제대로 의제21을 지부도 만들면서 또 지방정부와 토론을 하면서 진행을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체계도 그나마 잡혀 있는 편이죠.”

경기도에는 31개 시․군이 있고, 인구도 이미 서울을 따돌렸다. 푸른경기21이 이런 쉽지 않은 조건에서도 의제사업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의제의 방향성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 푸른경기 상근자는 특화업무 담당자를 포함해 총 7명이다. 상근자 규모도 전국에서 제일 크다. 두 번째 질문으로, 지난 10년간의 의제사업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는데, 지방의제21과 관련해서는 지역의 특성이나 여건을 살려서 지방마다 자율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긴 한데, 어떤 일이든 간에 큰 틀의 흐름이나 방향 설정들은 또 다른 차원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지방의제21사업이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다보니까 지방의제21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다른 것 같거든요. 공무원들이 받아들이는 거라든지, 또는 초창기에 지방의제21을 받아들여서 보고서를 끝냈던 경우, 또 몇몇 지역에서는 시민사회운동으로서 바라보고 접근해서 지방정부와 협력해서 프로그램화해서 진행했던 경우, 또 그냥 환경담당자가 평가나 이런 것 때문에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했던 경우도 있고요. 그러다보니까 현재의 지방의제21에 대해서는 이해에 대한 편차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한 지역 같은 경우는 사회운동으로 하나의 활용방식으로 접근하는 곳도 있고요, 또 어느 지역에서는 지방정부가 중심적으로 시민사회를 포섭하는 과정으로서 지방의제21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고, 또 안 좋은 경우지만 지방의제21이 어떤 일정한 제도화나 정착이 되는 과정에 하나의 사회운동의 기득권으로서의 폐해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구체적인 사례를 들었지만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지는 않기로 한다)......지방의제21이 그렇게 지역적으로 진행되는 과정들이 한편에서는 중앙정부나 한국사회의 시민단체들의 일정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또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는 연구소나 기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해서 확산을 시켰으면 지난 10년이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성과들 가지고 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가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좁혀, 지방의제의 내용을 근거로 그 동안 진행된 우리나라의 의제사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사실, 그런 내용들로 평가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 현재 220여개 정도 의제가 작성이 돼서 보고가 되어 있는데, 거의 제가 보기에는 100%가 다 활용하지 못하는 지방의제21이 작성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몇몇 지역에서 시민운동 차원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그런 측면에서 의미는 있을 것 같고요, 실질적으로 지역사회를 바꾸려고 하면 행정이 그 계획을 수용을 해서 반영해서 집행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의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재 경기도도 재작성 하고 있고, 또 서울시에서 의제를 수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핵심을 그런 것 같아요. 지방의제21 활동이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 계획들이 행정과 연계되거나 또는 행정으로 통합되거나 이런 과정이 되지 않으면 본래 지방의제21 의미의 반쪽 정도, 시민사회운동, 민관협력운동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물론 그것도 우리 사회에서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본래 취지에서는 상당히 후퇴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왜곡될 수 있는 요소도 있고 해서, 하나는 한국사회 지방의제21을 제대로 작성할 필요가 있겠다는 고민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지방의제21 추진기구가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폭넓은 그런 지역역량을 통합해 나가는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걸 바탕으로 해서 지방정부와 협력하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부문적인 통합력을 갖다보니까, 지역의 다른 요소에 의해서 지방의제21 활동이 중단되거나 또는 파행을 걷는 곳이 참 많이 있고요, 올바른 민관렵력 지방정부와 협의 조정, 타협하는 이런 역할들이 상당히 진행되지 못하는 이런 경우를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이런 과제들은 지방의제21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과제 같고요, 민관협력이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효율적으로 민관협력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양쪽이 다 올바른 관점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거고, 또 하나는 그것을 행정은 행정대로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거고, 시민사회는 시민사회 나름대로 민관협력에 대한 올바른 과점을 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이나 조직적 운영 경험이나 역량을 키워나가는, 그런 우수한 인력들을 확보하는 문제들, 이런 문제가 현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유문종 사무처장은 ‘활용할 수 없는 의제’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그래서 경기도나 서울시의 지방의제 추진기구가 의제를 새롭게 작성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민간의 참여로 만들어진 지역의 의제가 선언적인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가 이를 받아 안아 지역발전계획의 중요한 축으로 가동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양자가 조금씩 변해야 한다고 유문종 처장은 진단한다. 어려운 과제지만 의제가 실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인 것 같다. 의제를 바라보는 공무원들의 시각도 많이 변한 것을 보면 좋은 징조로 보인다.

"공무원들의 이해도가 많이 나아졌어요. 일정하게는 지방의제21 추진기구는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합의, 전에는 많은 간섭과 개입들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의제21 자율성을 많이 보장하고 지원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또 한편에서 보면 지방의제21이 협력, 협의기구인데, 지방정부가 오히려 불필요하게 발을 빼는 방관자적 위치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두려움도 있거든요. 그래서 한편에서는 예전에 불필요한 개입과 왜곡된 간섭들이 아니라 올바른 개입, 올바른 간섭, 합리적 토론, 이런 것이 과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방정부가 모든 것을 다 추진기구에 맡겨서 추진기구가 자율적으로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민관협력은 아닌 것이죠. 일반 NGO 단체나 자율적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될 수 있어도 의제21은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여하이 지방정부 행정의 참여와 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고, 또 시민사회의 참여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서로 어떻게 협의, 협력할 것인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옳은 지적인 것 같다. 행정부의 지나친 간섭이나 불필요한 방관도 민관협력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되, 적당한 개입(물론, 말처럼 쉽지 않지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민간협력기구의 모양새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지방의제21은 조금씩 변화․발전되어 왔다. 지역에 따라 의제를 재작성할 정도로 의지도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물었다. 모델을 내세우긴 힘들겠지만, 추구하는 모델이 있는지, 또는 국내외적으로 소개할만한 의제사례가 있는지.......

“음.......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저도 좀 아직 계속 그런 고민 중이긴 한데, 예컨대 인천 의제 같은 경우가 정기적인 평가 계획을 애초부터 세워서 그것을 나름대로 성실히 진행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인천 의제가, 정확히 확인을 더 해봐야 하는데, 의제의 여러 내용들이 행정이 많이 활용을 하고 있다고 그래요, 참고도 하고 있고, 그런 사례를 저도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고요, 인천의제의 보고를 들으면서 또 얘기 나누면서 느꼈던 건데, 작성된 인천의제가 정확히 행정 개입과는 결합은 안 돼 있어도 나름대로 행정도 많이 참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거든요. 그런 것도 구체적으로 사례를 보고 싶고요, 그리고 적지 않은 인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니까, 인천의제가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로 발전되고 있지 않나 생각되거든요. 의제로 봐서 지방의제21의 본래 목적이나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봐서는 인천의제가 나름대로 굉장히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앞서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다른 측면에서 지방의제21 민관협력을 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경기도 사례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 같아요. 경기 지역 시민사회의 중요한 그룹이 들어와 있고, 나름대로 논의대로 경기도의 정책에 상징적으로 반영된 경우도 있거든요.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구성 과정이라든지 또는 경기도정 환경교육센터나 이런 것들은 어쨌든 NGO의 의견들을 경기도가 받았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물론 장소 문제에 대해서는 경기도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있는데, 추진 과정들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경기도도 민관협력도 그린환경교육센터 추진협의회를 만들어서 같이 토론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 지점들은 경기도 지역의 의제들이 지방의제21 고유의 지속가능한 발전계획을 행정과 연계시켜서 협력해 나가는 부분들은 취약한데, 그것은 푸른경기21이 갖고 있는 한계였죠. 당시 98년, 99년도에 초기 작성했던 의제21이라는 것이 행정보다는 상징성들을 많이 가졌던 측면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행정이 받아서 정책에 반영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그런 지방의제21이 본래의 내용과 달라도 경기 지역에서는 민간협력이 사회운동으로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게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이런 부분들은 기초로 내려가도 안산의제를 보면 상당히 지역사회에서도 의제21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나 통합력을 갖고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의제21을 통한 안산시정의 변화나 참여, 개입력 이런 것들도 다른 시군보다 월등히 높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경기지역의 지방의제21이 다른 측면에서의 평가들은 축적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지역에 따라 의제사업이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의제사업에서 나온 좋은 아이디어들을 행정부가 소홀히 다룰 수 없다는 시대적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공무원들이 NGO를 대등한 파트너로 여기도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물었다.

“그런 부분들은 이미 정상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간에 시민사회가 이제는 필연이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것이 아니고 요구하면 받아줘야 한다, 아직까지는 귀찮은 것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은 있는데, 지금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나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일로 경기도 각 부서 담당자들을 보면 푸른경기21에서 사무처장이라고 인사를 하면 대부분 많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고, 물론 내심은 모르죠, 어떤지는. 그래도 도움은 되려고 노력하고 협력하려고 하는 태도는 있는 것 같아요.”

정확한 지적일지 모르겠다. 지방의제21 추진기구가 싫든, 좋든,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조건. 껄끄럽기도 하고, 등 떠밀려 마지못해 동참하는 민관협력일지언정, 어느 특정한 파트너가 독단적으로 파토낼 수 없는 그런 조건. 민간단체의 노력에 의한 결실이기도 하고, 행정부의 자기혁신 과정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외부적인 지시(유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추진된 의제사업이 서로를 필요로 할 정도로 발전해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의제사업은 애매한 위치라는 지적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한 것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을 생산하는 역할도 아니고.......그래서 의제사업의 정체성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말씀대로 요즘 그런 식의 고민에 많은 집중을 하고 있어요. 지방의제21이 실천 단위로서 주민사업을 많이 하고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본연의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에서는 우리 한국사회의 주민운동이 열악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맡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게 어쩌면 외국하고 다르게 한국형 지방의제21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지방의제21은 세계적인 운동인데, 한국형이라고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잘못된 건데, 그런 것은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필요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본연의 지방의제21 일은 지역사회의 행정시스템, 아니면 정책수립과 집행과정, 집행 후의 평가, 이런 모든 흐름들을 바꿔나가는 것이 지방의제21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사실 이런 지점들이 공무원들과 많은 괴리가 있어요. 공무원들은 시스템의 변화나 소위 인식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고, 그리고 사업 지원 예산 당 효과를 추출하는데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공무원들한테는 상당히 어려운 거죠. 그러니까 요번에 재작성 사업 같은 경우는 공무원들이 작년에 상당히 반대했거든요. 굳이 있는데 재작성을 또 하느냐, 거기에 돈을 쓰느냐, 해봤자 주민들이 몇 명이나 알 거며, 무슨 효과가 있느냐 했거든요. 우리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작성 과정을 통해서 행정과 NGO가 그 분야만큼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내고 비록 제한된 영역이지만 그것만큼은 시민사회가 폭넓게 지켜보겠다, 그리고 함께 참여해서 같이 노력하겠다, 이런 것이 의제 재작성의 과정이라면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지점들, 그리고 지방의제21이 애초에 가졌던 지속가능한 지역발전 전략이라면 그것을 행정이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모든 중장기 계획을 세우게 하고 각 실국, 부서별로도 지속가능성을 반영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 행정시스템의 변화, 행정부의 적극적 참여가 관건처럼 보인다.

“그런 거죠. 행정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이것은 한편에서 보면 또 여전히 시민사회운동적 측면에서 강조가 되면 오래 못 갈 것 같아요. 그것은 굳이 지방의제21 틀을 가지고 민관협력을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지속가능성의 가치의 기반 하에서 민관협력을 하는 거지, 지방의제21이 민관협력의 모든 대변체가 돼서 해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했던 그런 시스템의 변화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행정의 담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지방의제21이 왜곡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모든 민관협력 사업이 다 이리로 와서 여기서 통과하거나 여기서 통합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거고요.”

지역이든, 전국협의회든 지방의제21사업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경험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쉽지도 않을 것이다. 세밀하게 들어가면 각 지방자치단체 추진기구 사무국장들 간에도,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 간에도, 공무원 간에도 지방의제를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문종 사무처장의 경우는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중요한 푯대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가치’에 기반한 거버넌스 시스템. 그렇다면 유문종 처장이 생각하는 ‘지속가능성’은 무엇이고 바람직한 거버넌스는 무엇일까?

“저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정치적 술어라는 생각이 들고요, 어쩌면 우리로서는 우리가 가진 위치에서 최소한의 훼손들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그것을 근본적 입장에서 현재의 흐름에 대항해서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지만, 한편에서는 전체적은 주류적 흐름 속에서 안에서 이런 노력들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그것은 분명히 철학적 관점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것을 절대 선으로서 고집해서 지속가능 발전이 모든 것들에 집중해서 다른 모든 사회운동들도 이런 체계로서 확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그리고 거버넌스는.......글쎄요, 참 쉽지 않은 것인데, 저도 녹색거버넌스 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일정하게 머리 속에서 뱅뱅 돌고 있는 개념일 수도 있고, 정리를 하려면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보는데, 이런 노력들이 그냥 일시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할 수 있고 변화되지 않은 방향으로서의 규정들, 법제화나 제도화, 또는 여러 가지 경험이 쌓여서 관례화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앞으로 과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랬을 때는 한편에서는 현재까지 이루어진 부분들에 대해서 후퇴하지 않게끔 일정하게 못을 받고 가는 과정들은 어떨까 이런 생각은 드는 거고요, 뭐, 조례가 됐든, 위원회가 됐든, 이런 것을 지속적으로 하나씩 높여나가는 과정들과, 또 한 가지는 지방 차원에서의 활동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지방 차원의 노력들이 같이 결합이 되지 않으면 분권화라고 하는 것이 아직은 많은 부분들이 중앙에 있는 거고, 또 관행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버넌스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앙 차원에서의 고민들이나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솔직히 저도 많이 공부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 동안 ‘지속가능성’의 개념이나, ‘거버넌스’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나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활인의 입장에선 낯설기도 하고 생활과 동떨어진 개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생활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시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중에서 회자되는 언어였다면,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을 때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이겠지만, 생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생활인에게 꽃이 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과 ‘거버넌스’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생활인의 꽃. 그것은 ‘삶터 가꾸기’일 수도 있고, ‘시민참여’일 수도 있고, ‘마을만들기’일 수도 있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어야 한다. 유문종 처장의 말처럼, ‘절대 선’이라는 아집을 버릴 때, 그런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민관협력의 바람직한 방향과 그를 위한 과제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대신한다.

"아까 계속 말씀하셨듯이 국민의 정부 이후로 상당히 많은 문호가 개방됐던 거고요, 거의 무차별적인 지원들이 시민사회에 쏟아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런 변화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쯤이면 그런 변화를 차분히 되돌아보면서 평가도 해보고 새로운 모색도 있는 것 같고요, 당연히 그런 시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편에서 보면 시대의 변화라는 것이 늘 준비된 것만큼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현명한 사람은 그런 변화들을 얼마나 내공 있게 준비해 나가느냐가 문제인 것 같고요, 지금으로서는 시민사회단체들도 좀 각각의 영역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너무 많이 사업의 영역이나 활동들이 확대되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자기 조건들보다는 월등하게 확장되어 있어서 사실은 수습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는 거고요, 그리고 시민사회 내에서도 지역사회에서 상호간의 역할분담이 전문화, 이런 것들도, 사실 전문화나 역할분담도 독자적으로 안 되는 거거든요. 시민사회의 연대와 협력 속에서 가능한 거고, 그럴 때만이 의미가 있는 거고요, 그래서 시민사회운동들도 지역사회에서도 그런 노력을 통해서 발전되지 않으면 시민사회운동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민관협력도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사회가 얼마만큼 자기 역량들을 키우고 실력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행정은 어쨌든 큰 틀에서 여러 가지 계속 변화될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가고 있고 이미, 바꿀 수 없는 거고, 또 행정의 변화의 모습들도 부분적으로 차별이 많이 될 거예요. 어떤 부서는 많은 개방성과 적극성이 있고, 또 어떤 부서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여전히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큰 흐름을 봤을 때 지역시민사회의 준비나 역량에 따라서 바뀔 거고, 그래서 어쨌든 민간에서 사업들도 특정 분야에 특정 사업에 집중을 해서 자꾸 모델을 만들고 확산시켜나가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의제21도 전반적인 통합력과 지방정부의 협력이겠지만, 전술적이라도 특정분야나 사업에 아이템을 집중을 해서 거기서 성과를 남기고 확산시키는 이런 전술적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홈페이지는 http://www.ggag21.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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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협력은 어디쯤?-“푸른경기21실천협의회”를 찾아
인터뷰 : 유문종 사무처장(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제한된 행정부의 인원만으로 복잡한 지방자치단체의 살림은 꾸려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 영역별로 파트너가 있기 마련이다. 전문가 집단일 수도 있고, 경제인이 될 수도 있고, 관변단체나 시민단체가 될 수도 있다. 각종 이익집단이나 개발업자, 지역의 토호세력들도 어떻게 보면 공생을 위한 조건으로 서로 파트너를 형성하기도 한다. 행정부의 필요에 의해서, 또는 각 집단들의 필요에 의해서 얼기설기 파트너 관계망이 중앙 못지않게 지역에서도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파트너십은 행정부가 정책을 입안할 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곤 한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파트너십이라면 몰라도,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유지되는 파트너십 관계는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지저분한 뒷거래가 드러날 때도 있다. 그래서 시민들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잘못된 정책이 횡횡함으로써 시민의 혈세가 바닥에 뿌려지기도 한다. 잘못된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지방자치를 좀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식적이고 공개적이며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파트너십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민관협력기구로 불리는 ‘지방의제21’사업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92년, 유엔이 권고한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협의회를 구성하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0여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지방의제21 사업은 파행을 겪었던 몇 몇 지역을 제외하고 한국적 의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한국적’이라는 평가 잣대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과 다른 한국식의 모델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식 모델의 현재적 좌표는 어디일까? 행정부의 입장에서, 또 민간단체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일 수도 있고, 지역에 따라 평가의 지점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정답을 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협의기구를 통해 행정과 민간의 거리 폭을 줄였다는데 커다란 이견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제는 단체장이 바뀌거나 담당 공무원이 바뀐다고 해서 의제의 경로가 확 바뀌는 체제는 아닌 듯싶다. 그래서 지방의제21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이런 시점에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의 유문종 사무처장을 만났다. 유문종 사무처장은 오랫동안 지방의제 사업에 관여해왔고 누구보다 이 사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활동가 중에 한 명이다. 그가 최근 고민하고 있는 부분,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단,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푸른경기가 98년도부터 해서 99년도에 시범사업을 발표했죠. 그리고 제 기억에는 99년도 6월 5일에 아마 푸른경기21이 선포됐을 거예요. 그 때 1월 달부터 한참 서둘러서 의제 만들고, 8개 분야로 만들었죠. 6월 환경의 날 전후로 선포한 것으로 기억하고, 당시 저는 수원의제21에서 경기의제 참여를 했죠.......뭐 여러 가지 면에서 경기도가 한국의 지방의제21을 선도하고 있다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지방자치단체 규모도 그렇고요, 인구도 그렇고, 31개 기초지자체를 거느리고 있는 곳이, 서울이 25개인가요, 경북이 23개인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전남이 18개, 이렇게 경기도가 가지고 있는 규모가 있는 것 같고요. 또 규모도 규모지만 지방의제21의 추진 속도나 활동 내용을 보면 굉장히 왕성하고요. 대부분 경상남북도나 전남을 보면 지방의제21 보고서를 만들고 그냥 끝낼 필요가 있는 상태인데 지금 다시 끄집어내서 추진기구도 만들고 조례도 만들고 이런 흐름이 있는데 경기도는 시작부터 경기도 시군들이 제대로 의제21을 지부도 만들면서 또 지방정부와 토론을 하면서 진행을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체계도 그나마 잡혀 있는 편이죠.”

경기도에는 31개 시․군이 있고, 인구도 이미 서울을 따돌렸다. 푸른경기21이 이런 쉽지 않은 조건에서도 의제사업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의제의 방향성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 푸른경기 상근자는 특화업무 담당자를 포함해 총 7명이다. 상근자 규모도 전국에서 제일 크다. 두 번째 질문으로, 지난 10년간의 의제사업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는데, 지방의제21과 관련해서는 지역의 특성이나 여건을 살려서 지방마다 자율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긴 한데, 어떤 일이든 간에 큰 틀의 흐름이나 방향 설정들은 또 다른 차원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지방의제21사업이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다보니까 지방의제21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다른 것 같거든요. 공무원들이 받아들이는 거라든지, 또는 초창기에 지방의제21을 받아들여서 보고서를 끝냈던 경우, 또 몇몇 지역에서는 시민사회운동으로서 바라보고 접근해서 지방정부와 협력해서 프로그램화해서 진행했던 경우, 또 그냥 환경담당자가 평가나 이런 것 때문에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했던 경우도 있고요. 그러다보니까 현재의 지방의제21에 대해서는 이해에 대한 편차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한 지역 같은 경우는 사회운동으로 하나의 활용방식으로 접근하는 곳도 있고요, 또 어느 지역에서는 지방정부가 중심적으로 시민사회를 포섭하는 과정으로서 지방의제21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고, 또 안 좋은 경우지만 지방의제21이 어떤 일정한 제도화나 정착이 되는 과정에 하나의 사회운동의 기득권으로서의 폐해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구체적인 사례를 들었지만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지는 않기로 한다)......지방의제21이 그렇게 지역적으로 진행되는 과정들이 한편에서는 중앙정부나 한국사회의 시민단체들의 일정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또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는 연구소나 기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해서 확산을 시켰으면 지난 10년이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성과들 가지고 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가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좁혀, 지방의제의 내용을 근거로 그 동안 진행된 우리나라의 의제사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사실, 그런 내용들로 평가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 현재 220여개 정도 의제가 작성이 돼서 보고가 되어 있는데, 거의 제가 보기에는 100%가 다 활용하지 못하는 지방의제21이 작성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몇몇 지역에서 시민운동 차원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그런 측면에서 의미는 있을 것 같고요, 실질적으로 지역사회를 바꾸려고 하면 행정이 그 계획을 수용을 해서 반영해서 집행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의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재 경기도도 재작성 하고 있고, 또 서울시에서 의제를 수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핵심을 그런 것 같아요. 지방의제21 활동이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 계획들이 행정과 연계되거나 또는 행정으로 통합되거나 이런 과정이 되지 않으면 본래 지방의제21 의미의 반쪽 정도, 시민사회운동, 민관협력운동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물론 그것도 우리 사회에서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본래 취지에서는 상당히 후퇴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왜곡될 수 있는 요소도 있고 해서, 하나는 한국사회 지방의제21을 제대로 작성할 필요가 있겠다는 고민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지방의제21 추진기구가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폭넓은 그런 지역역량을 통합해 나가는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걸 바탕으로 해서 지방정부와 협력하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부문적인 통합력을 갖다보니까, 지역의 다른 요소에 의해서 지방의제21 활동이 중단되거나 또는 파행을 걷는 곳이 참 많이 있고요, 올바른 민관렵력 지방정부와 협의 조정, 타협하는 이런 역할들이 상당히 진행되지 못하는 이런 경우를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이런 과제들은 지방의제21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과제 같고요, 민관협력이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효율적으로 민관협력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양쪽이 다 올바른 관점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거고, 또 하나는 그것을 행정은 행정대로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거고, 시민사회는 시민사회 나름대로 민관협력에 대한 올바른 과점을 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이나 조직적 운영 경험이나 역량을 키워나가는, 그런 우수한 인력들을 확보하는 문제들, 이런 문제가 현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유문종 사무처장은 ‘활용할 수 없는 의제’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그래서 경기도나 서울시의 지방의제 추진기구가 의제를 새롭게 작성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민간의 참여로 만들어진 지역의 의제가 선언적인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가 이를 받아 안아 지역발전계획의 중요한 축으로 가동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양자가 조금씩 변해야 한다고 유문종 처장은 진단한다. 어려운 과제지만 의제가 실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인 것 같다. 의제를 바라보는 공무원들의 시각도 많이 변한 것을 보면 좋은 징조로 보인다.

"공무원들의 이해도가 많이 나아졌어요. 일정하게는 지방의제21 추진기구는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합의, 전에는 많은 간섭과 개입들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의제21 자율성을 많이 보장하고 지원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또 한편에서 보면 지방의제21이 협력, 협의기구인데, 지방정부가 오히려 불필요하게 발을 빼는 방관자적 위치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두려움도 있거든요. 그래서 한편에서는 예전에 불필요한 개입과 왜곡된 간섭들이 아니라 올바른 개입, 올바른 간섭, 합리적 토론, 이런 것이 과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방정부가 모든 것을 다 추진기구에 맡겨서 추진기구가 자율적으로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민관협력은 아닌 것이죠. 일반 NGO 단체나 자율적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될 수 있어도 의제21은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여하이 지방정부 행정의 참여와 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고, 또 시민사회의 참여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서로 어떻게 협의, 협력할 것인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옳은 지적인 것 같다. 행정부의 지나친 간섭이나 불필요한 방관도 민관협력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되, 적당한 개입(물론, 말처럼 쉽지 않지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민간협력기구의 모양새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지방의제21은 조금씩 변화․발전되어 왔다. 지역에 따라 의제를 재작성할 정도로 의지도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물었다. 모델을 내세우긴 힘들겠지만, 추구하는 모델이 있는지, 또는 국내외적으로 소개할만한 의제사례가 있는지.......

“음.......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저도 좀 아직 계속 그런 고민 중이긴 한데, 예컨대 인천 의제 같은 경우가 정기적인 평가 계획을 애초부터 세워서 그것을 나름대로 성실히 진행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인천 의제가, 정확히 확인을 더 해봐야 하는데, 의제의 여러 내용들이 행정이 많이 활용을 하고 있다고 그래요, 참고도 하고 있고, 그런 사례를 저도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고요, 인천의제의 보고를 들으면서 또 얘기 나누면서 느꼈던 건데, 작성된 인천의제가 정확히 행정 개입과는 결합은 안 돼 있어도 나름대로 행정도 많이 참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거든요. 그런 것도 구체적으로 사례를 보고 싶고요, 그리고 적지 않은 인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니까, 인천의제가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로 발전되고 있지 않나 생각되거든요. 의제로 봐서 지방의제21의 본래 목적이나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봐서는 인천의제가 나름대로 굉장히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앞서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다른 측면에서 지방의제21 민관협력을 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경기도 사례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 같아요. 경기 지역 시민사회의 중요한 그룹이 들어와 있고, 나름대로 논의대로 경기도의 정책에 상징적으로 반영된 경우도 있거든요.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구성 과정이라든지 또는 경기도정 환경교육센터나 이런 것들은 어쨌든 NGO의 의견들을 경기도가 받았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물론 장소 문제에 대해서는 경기도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있는데, 추진 과정들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경기도도 민관협력도 그린환경교육센터 추진협의회를 만들어서 같이 토론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 지점들은 경기도 지역의 의제들이 지방의제21 고유의 지속가능한 발전계획을 행정과 연계시켜서 협력해 나가는 부분들은 취약한데, 그것은 푸른경기21이 갖고 있는 한계였죠. 당시 98년, 99년도에 초기 작성했던 의제21이라는 것이 행정보다는 상징성들을 많이 가졌던 측면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행정이 받아서 정책에 반영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그런 지방의제21이 본래의 내용과 달라도 경기 지역에서는 민간협력이 사회운동으로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게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이런 부분들은 기초로 내려가도 안산의제를 보면 상당히 지역사회에서도 의제21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나 통합력을 갖고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의제21을 통한 안산시정의 변화나 참여, 개입력 이런 것들도 다른 시군보다 월등히 높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경기지역의 지방의제21이 다른 측면에서의 평가들은 축적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지역에 따라 의제사업이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의제사업에서 나온 좋은 아이디어들을 행정부가 소홀히 다룰 수 없다는 시대적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공무원들이 NGO를 대등한 파트너로 여기도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물었다.

“그런 부분들은 이미 정상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간에 시민사회가 이제는 필연이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것이 아니고 요구하면 받아줘야 한다, 아직까지는 귀찮은 것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은 있는데, 지금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나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일로 경기도 각 부서 담당자들을 보면 푸른경기21에서 사무처장이라고 인사를 하면 대부분 많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고, 물론 내심은 모르죠, 어떤지는. 그래도 도움은 되려고 노력하고 협력하려고 하는 태도는 있는 것 같아요.”

정확한 지적일지 모르겠다. 지방의제21 추진기구가 싫든, 좋든,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조건. 껄끄럽기도 하고, 등 떠밀려 마지못해 동참하는 민관협력일지언정, 어느 특정한 파트너가 독단적으로 파토낼 수 없는 그런 조건. 민간단체의 노력에 의한 결실이기도 하고, 행정부의 자기혁신 과정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외부적인 지시(유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추진된 의제사업이 서로를 필요로 할 정도로 발전해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의제사업은 애매한 위치라는 지적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한 것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을 생산하는 역할도 아니고.......그래서 의제사업의 정체성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말씀대로 요즘 그런 식의 고민에 많은 집중을 하고 있어요. 지방의제21이 실천 단위로서 주민사업을 많이 하고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본연의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에서는 우리 한국사회의 주민운동이 열악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맡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게 어쩌면 외국하고 다르게 한국형 지방의제21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지방의제21은 세계적인 운동인데, 한국형이라고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잘못된 건데, 그런 것은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필요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본연의 지방의제21 일은 지역사회의 행정시스템, 아니면 정책수립과 집행과정, 집행 후의 평가, 이런 모든 흐름들을 바꿔나가는 것이 지방의제21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사실 이런 지점들이 공무원들과 많은 괴리가 있어요. 공무원들은 시스템의 변화나 소위 인식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고, 그리고 사업 지원 예산 당 효과를 추출하는데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공무원들한테는 상당히 어려운 거죠. 그러니까 요번에 재작성 사업 같은 경우는 공무원들이 작년에 상당히 반대했거든요. 굳이 있는데 재작성을 또 하느냐, 거기에 돈을 쓰느냐, 해봤자 주민들이 몇 명이나 알 거며, 무슨 효과가 있느냐 했거든요. 우리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작성 과정을 통해서 행정과 NGO가 그 분야만큼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내고 비록 제한된 영역이지만 그것만큼은 시민사회가 폭넓게 지켜보겠다, 그리고 함께 참여해서 같이 노력하겠다, 이런 것이 의제 재작성의 과정이라면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지점들, 그리고 지방의제21이 애초에 가졌던 지속가능한 지역발전 전략이라면 그것을 행정이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모든 중장기 계획을 세우게 하고 각 실국, 부서별로도 지속가능성을 반영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 행정시스템의 변화, 행정부의 적극적 참여가 관건처럼 보인다.

“그런 거죠. 행정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이것은 한편에서 보면 또 여전히 시민사회운동적 측면에서 강조가 되면 오래 못 갈 것 같아요. 그것은 굳이 지방의제21 틀을 가지고 민관협력을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지속가능성의 가치의 기반 하에서 민관협력을 하는 거지, 지방의제21이 민관협력의 모든 대변체가 돼서 해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했던 그런 시스템의 변화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행정의 담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지방의제21이 왜곡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모든 민관협력 사업이 다 이리로 와서 여기서 통과하거나 여기서 통합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거고요.”

지역이든, 전국협의회든 지방의제21사업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경험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쉽지도 않을 것이다. 세밀하게 들어가면 각 지방자치단체 추진기구 사무국장들 간에도,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 간에도, 공무원 간에도 지방의제를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문종 사무처장의 경우는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중요한 푯대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가치’에 기반한 거버넌스 시스템. 그렇다면 유문종 처장이 생각하는 ‘지속가능성’은 무엇이고 바람직한 거버넌스는 무엇일까?

“저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정치적 술어라는 생각이 들고요, 어쩌면 우리로서는 우리가 가진 위치에서 최소한의 훼손들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그것을 근본적 입장에서 현재의 흐름에 대항해서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지만, 한편에서는 전체적은 주류적 흐름 속에서 안에서 이런 노력들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그것은 분명히 철학적 관점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것을 절대 선으로서 고집해서 지속가능 발전이 모든 것들에 집중해서 다른 모든 사회운동들도 이런 체계로서 확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그리고 거버넌스는.......글쎄요, 참 쉽지 않은 것인데, 저도 녹색거버넌스 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일정하게 머리 속에서 뱅뱅 돌고 있는 개념일 수도 있고, 정리를 하려면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보는데, 이런 노력들이 그냥 일시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할 수 있고 변화되지 않은 방향으로서의 규정들, 법제화나 제도화, 또는 여러 가지 경험이 쌓여서 관례화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앞으로 과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랬을 때는 한편에서는 현재까지 이루어진 부분들에 대해서 후퇴하지 않게끔 일정하게 못을 받고 가는 과정들은 어떨까 이런 생각은 드는 거고요, 뭐, 조례가 됐든, 위원회가 됐든, 이런 것을 지속적으로 하나씩 높여나가는 과정들과, 또 한 가지는 지방 차원에서의 활동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지방 차원의 노력들이 같이 결합이 되지 않으면 분권화라고 하는 것이 아직은 많은 부분들이 중앙에 있는 거고, 또 관행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버넌스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앙 차원에서의 고민들이나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솔직히 저도 많이 공부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 동안 ‘지속가능성’의 개념이나, ‘거버넌스’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나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활인의 입장에선 낯설기도 하고 생활과 동떨어진 개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생활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시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중에서 회자되는 언어였다면,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을 때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이겠지만, 생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생활인에게 꽃이 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과 ‘거버넌스’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생활인의 꽃. 그것은 ‘삶터 가꾸기’일 수도 있고, ‘시민참여’일 수도 있고, ‘마을만들기’일 수도 있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어야 한다. 유문종 처장의 말처럼, ‘절대 선’이라는 아집을 버릴 때, 그런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민관협력의 바람직한 방향과 그를 위한 과제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대신한다.

"아까 계속 말씀하셨듯이 국민의 정부 이후로 상당히 많은 문호가 개방됐던 거고요, 거의 무차별적인 지원들이 시민사회에 쏟아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런 변화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쯤이면 그런 변화를 차분히 되돌아보면서 평가도 해보고 새로운 모색도 있는 것 같고요, 당연히 그런 시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편에서 보면 시대의 변화라는 것이 늘 준비된 것만큼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현명한 사람은 그런 변화들을 얼마나 내공 있게 준비해 나가느냐가 문제인 것 같고요, 지금으로서는 시민사회단체들도 좀 각각의 영역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너무 많이 사업의 영역이나 활동들이 확대되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자기 조건들보다는 월등하게 확장되어 있어서 사실은 수습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는 거고요, 그리고 시민사회 내에서도 지역사회에서 상호간의 역할분담이 전문화, 이런 것들도, 사실 전문화나 역할분담도 독자적으로 안 되는 거거든요. 시민사회의 연대와 협력 속에서 가능한 거고, 그럴 때만이 의미가 있는 거고요, 그래서 시민사회운동들도 지역사회에서도 그런 노력을 통해서 발전되지 않으면 시민사회운동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민관협력도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사회가 얼마만큼 자기 역량들을 키우고 실력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행정은 어쨌든 큰 틀에서 여러 가지 계속 변화될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가고 있고 이미, 바꿀 수 없는 거고, 또 행정의 변화의 모습들도 부분적으로 차별이 많이 될 거예요. 어떤 부서는 많은 개방성과 적극성이 있고, 또 어떤 부서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여전히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큰 흐름을 봤을 때 지역시민사회의 준비나 역량에 따라서 바뀔 거고, 그래서 어쨌든 민간에서 사업들도 특정 분야에 특정 사업에 집중을 해서 자꾸 모델을 만들고 확산시켜나가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의제21도 전반적인 통합력과 지방정부의 협력이겠지만, 전술적이라도 특정분야나 사업에 아이템을 집중을 해서 거기서 성과를 남기고 확산시키는 이런 전술적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 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홈페이지는 http://www.ggag21.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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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참여, 산업재해를 줄이는 지름길"
- '노동건강연대'를 찾아

인터뷰 : 전수경(상근 활동가)/스즈키 아키라(자원활동가)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우리나라 산업재해 중 6-70%는 50명 이하의 영세업체에서 발생한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의 경우 산업현장에서 평균 날마다 224명이 다치거나 업무와 연관된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7명은 귀중한 생명을 잃고 있다. OECD 중에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세업체의 환경개선과 산업재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수백 억 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재해는 줄어들 기세가 안 보인다. 최근 미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안전보건에 1달러를 투자하면 4달러의 편익이 발생한다는 분석결과를 내고 있는데, 이런 원리에 따르면 정부가 투자한 만큼 노동자의 편익이 발생해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노동건강연대의 전수경 상근 활동가는 이렇게 진단한다.

“.......수백억의 돈이 다 어디로 가냐면, 대한산업보건협회와 같은 정부의 일을 대행하는 협회라든지 여러 가지 직능단체들이 예산 지원을 받아 집행합니다. 실제로 노동자들과 사업주들은 이 사업에 소외되어 있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는 거죠. 정부의 고민도 이런 것에 있습니다. 왜 쏟아 부었는데 개선은 안 되는가?, 불만은 많은데 나아지는 것이 없는가, 그래서 여기 저기 프로젝트도 주고 용역도 해마다 많이 줍니다. 그런데 그 중에 빠진 것은 뭐냐면, 노동자들과 노조가 주체라는 사실을 빼먹거든요. 노동자와 노조가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의 안전을 남에게 맡기는 순간, 인간 소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생명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영세업체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산업재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의 정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동안전 정책이 추진된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위 노동건강연대의 ‘성수동 사업’은 이런 원칙을 뼈대로 하고 있다. ‘성수동 사업’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노동안전 활동이다.

성수동은 구로, 문래 등과 같이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영세업종 밀집 지역이다. 제화, 금속, 인쇄가 주를 이룬다. 필자도 90년 대 초에 성수도 금형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 이 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많게는 10여 명이, 적게는 3-4명이 환기도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14시간 동안 똑 같이 반복되는 일을 쉴 틈 없이 하고, 토요일, 일요일이란 개념도 잊은 채, 일이 있으면 나와야 하는 그런 작업환경이었다. 전수경 활동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노동건강연대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에겐 이런 교육도 사치였다. 좀처럼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영세업체들의 산재문제는 한 지역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구체적인 영세업체 밀집지역 안에서 모범 사례를 하나 만들게 되면, 점차적으로 나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경험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성수동 사업’은 시작된다.

“‘성수동 사업’이라는 사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일방적 강의방식을 폐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영세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일찍 퇴근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요일도 일 있으면 나가고, 빨간 날이라면 쉰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이나 강의를 하려 한다면 한 밤중에 하거나 토요일 밤에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의 교육을 생각하다가, 일본에서 만든 프로그램 하나를 채택했는데, 약자로 포지티브(Posivive)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어감도 좋긴 하지만, 약자를 쭉 풀면 POSITIVE(Participation Oriented Safety Improvement by Trade Union Initiative)가 되거든요.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공장 안에서의 안전 개선활동이라고 풀 수 있는데, 이것은 지역 안에서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편하게 할 수 있는 접근법, 훈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OSITIVE 프로그램’은 ‘도쿄 노동안전위생센터’라는 단체에서 고안하여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강의방식을 배제하고 노동자들이 직접 ‘작업장 체크리스트’를 들고 다니면서 자기 공장 안의 사소한 환경을 체크하는 방식이다. ‘작업장 체크리스트’만 있으면 별도의 예산이 필요 없다. 무엇보다 나타난 결과들은 사업주나 관리자들과 얘기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또 POSITIVE 프로그램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제안’할 수도 있고, 직접 내가 ‘바꿀’ 수도 있다. 이런 결과들을 작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변화를 도출하는 ‘과정’이 POSITIVE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작업장 체크리스트’를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를테면 ‘물건의 운반과 보관’이라는 주제를 보자.

▶ “통로를 확보하고 표시를 한다.” - 이 개선을 제안하시겠습니까?
□ 필요 □ 불필요 □ 시급
▶ “공구 스탠드, 용기, 작업대 등을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 이 개선을 제안하기겠습니까?
□ 필요 □ 불필요 □ 시급

각 문항에는 이해하기 쉽게 그림이나 사진이 그려져 있다. 45개 정도의 문항을 체크하다 보면, 어떤 조치가 가장 필요하고 덜 필요한지, 사업주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해야 할 일 등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노동 안전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일순간에 모든 사업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작업장 체크리스트’는 우리 노동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일본에서 도입된 이 프로그램이 우리 상황과 딱 맞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노사관계가 우리보다 탄탄한 것이 현실이다. 작업장 환경 개선에 대한 노동자의 지적이 적대적인 노사관계의 우리나라 상황보다는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체크리스트가 일정한 성과를 가지려면 사업주들과 체크한 결과를 두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서로의 간극은 그리 좁지 않다.

“대부분의 사업주들은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들도 있어요. 고용된 사람들과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요. 대체적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냉소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사업주들이 노동자나 노조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고, 이런 분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사업주와 노동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작업환경의 안전에 대해 토론할 분위기는 아닌 듯싶다. 또한 사업주 스스로가 작업장 안전에 발 벗고 나설 여력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전수경 활동가는 ‘성수동 사업’을 ‘느리게 함께 가기’로 규정했다.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듯, 서두르지 않고 아주 느리게 야금야금 걸어갈 방침이다. 활동가가 아무리 독촉해도 노동자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노동건강연대에는 일본인 자원활동가가 있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한데, 이름은 ‘스즈키 아키라’이다. 이 사업의 가능성을 일구는 데도 스즈키의 역할이 컸다. 한국어 실력도 꽤 유창했다. 97년부터 한국생활에 적응했으니, 벌써 6년째다. 스즈키는 이 프로그램이 절대로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개선되어야 사항이나 단점, 불편한 사항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지적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일은 전문가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공학적으로나 산업안전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런 식의 방법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제가 ”이런 아이디어가 있으니까 검토해 달라“ 해서 채택된 겁니다. 우리가 현장 방문해서 찾는 것은 ‘좋은 점’을 찾습니다. 열악한 현장에서도 나름대로 노동의 장점을 살려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선 그런 것을 먼저 찾고, 다른 사업장과 이런 장점을 교류합니다. 이런 식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사진도 찍곤 하죠. 이런 식이라면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성됩니다.”

기본적으로 POSITIVE 프로그램은 협동의 사업이다. 서로 불신하고 적대적이라면 안전한 사업장의 실현은 요원하다.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는 동료의 문제이고, 동료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고민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이 프로그램이 한 번에 그쳤지만,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안전문제는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을 때만이 보장받을 수 있다. 내년에 다시 계획될 POSITIVE 프로그램과 ‘건강수첩’ 사업 등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길 기대하며, 이런 효과가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되길 희망해본다.

※ 노동건강연대의 홈페이지는 www.laborhealth.or.kr입니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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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의 오아시스" -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날짜 : 2002년 8월 30일(금) 오전 10시 40분
인터뷰 : 양혜우 소장
정리 : 김현

‘엷은 오렌지색'이 어떤 색인지 아시는가? 앞으로 생산되는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에는 ’살색'이라는 특정 색이 사라지게 된다. 지난 달 1일, 특정인종의 피부색과 유사한 색을 ‘살색’으로 표기한 것은 차별행위라며 외국인 4명이 진정을 낸 것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색을 대체해서 ‘엷은 오렌지색’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스케치북에 사람을 그린 후, 아무 의심 없이 ‘살색’이라고 적힌 크레파스로 피부색을 그려 넣은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67년 이후부터 ‘살색’이라고 믿어 왔으니, 적어도 한국 사람들은 35년간 ‘살색’의 진실을 잊고 살아 온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아이들이 갖고 노는 크레파스에만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인들이 존재하며, 한국인들도 이런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지고 보면 나찌의 만행도 민족우월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최근까지 그칠 줄 모르는 팔레스타인 분쟁 또한 인종 문제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 인종 차별의 피해자로 여겨졌던 우리나라도 최근 10여 년 전부터 가해자의 탈을 써오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름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삶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공백으로 남는다. 고국도 아니고 멀리 이국 타향에서 받는 설움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90년 이후부터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이하 ‘인권센터’)”가 낸 자료를 보면,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세계 무대에 부상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이 즈음, 아시아의 노동인력들이 석유 산유국으로 진출하였지만 오랜 중동전쟁으로 인해 노동인력의 수출 활로를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아시아계 노동 인력들이 서서히 늘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관광 비자로 입국하여 취업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사회로 불거진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 때를 시작으로 한다면 한국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이제 막 10여 년을 지나온 셈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피해를 입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평균 500만원의 이주비(주1)를 지불하면서 한국으로 건너온 후, 산업재해를 당했으면서도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 턱없이 부족한 월급, 이주노동자 절반 이상이 경험했다는 임금체불 등 심지어 먼 이국 땅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다 있다. 합법적인 연수생조차도 월 16만원에 불과한 임금을 받았을 뿐이며, 이 임금의 절반은 적립금이라는 명목으로 중소기업중앙협의회에 바쳐야했다. 이탈 방지의 차원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연 인간의 취급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양혜우 인권센터 소장의 말이다.

“이주노동자 인권의 문제의 핵심은 법과 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 인력이 거의 40만명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 단순노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단순노동력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합법적인 노동자들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기만적인 일이지요. 이 40만 명 중 약 8만 명 정도를 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데려와서 고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법이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기본적인 노동의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기는 것은 모든 문제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월급 못 받아서 노동부에 이를 고발하러 가면, 사업주가 출입국 관리소에 불법 체류자라고 신고합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지요. 또 어떤 노동자는 한국 사람에게 구타를 당해서 경찰서에 갔더니, 경찰이 대충 조사만 끝내고 ”당신은 미등록 노동자이니 출입국 관리소에 가야 한다“며 끌고 가서 강제 출국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떤 문제가 있어도 자기 문제를 하소연할 수가 없어요.”

그리니까,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80%는 불법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찰이 ‘강제출국’을 명령하면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나라 제도가 현실을 너무나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는 90년대 초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현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런 필요성에 의해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이 묵인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을 합법적인 노동자로 인정하려다 보니, 모든 부대비용이 덩달아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용간접 비용 즉, 주택문제, 의료문제, 월급문제, 퇴직금 문제 등 정부가 정당한 대가를 해줘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꼴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 두 가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제도를 구비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한국의 사업주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자신이 필요로 해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하고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비해 사업주들의 구타와 협박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한다.

인권센터는 바로 이렇게 차별 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을 한다. 그렇다고 지역의 관심사를 핵으로 하는 풀뿌리단체는 아니다. 인권센터의 역사는 이제 갓 1년을 넘겼다. 왜 인천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저희 단체에서 일하는 상근자들은 인천에 아무런 지역적 토대가 없습니다. 수도권의 경우, 인천과 의정부가 외국인이주노동자가 많은데, 상근자들의 조건상 의정부로의 출근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서울에 살거든요. 또 몇 몇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기왕이면, 인천이 의정부보다 큰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외국인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판단했고,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도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역적인 토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상담 같은 경우도 1/3에서 절반 정도가 인천에 거주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징적인 의미로서 인천을 택했다는 양혜우 소장의 이야기다. 첫 삽을 뜬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다보니,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이 남다른 것 같았다. 양 소장이 건네준 회지를 들춰보니 그 동안 네 명의 상근자가 월평균 받아간 활동비는 140여 만원에 불과했다. 이를 네 사람으로 나누면 35만원 불과한 액수다. 재정은 곧 역량의 문제이기도 한데, 양 소장에게 어렵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일단 이사회비로서 한 15-20%를 충당합니다. 나머지 80%는 일반 후원자들이죠. 사실, 매달 우리 단체가 200만원 정도의 적자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빚은 없구요.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재정이 한 60% 정도 됩니다. 40% 재정확보가 아직 안되었구요. 사실 실무자들의 상황이 어려운 형편이죠. 상근은 4명이 합니다. 최근 들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있는 창구가 마련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일단 정부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운영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재정의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돈 없이 살더라도 당분간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말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곧, 제가 생각하는 경제적 자립은 ‘우리가 하는 일의 질로 승부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을 보고 판단해서 마음이 동한다면, 충분히 후원회원에게 작지만 소중한 회비를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이런 고민은 올해부터 시작된 것이라서, 올 12월까지 재정을 꾸려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이후에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계획입니다.”

사실, 오래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치고 활동비를 제 때, 또는 제대로 받지 못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활동가는 없을 것이다. 열악한 조건임에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념에 대한 신념, 이를 위한 실천, 그리고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그 일에 대한 신명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양혜우 소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별하게 이주노동자 문제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구요, 저는 84학번인데, 저희 학번이 가졌던 사회적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런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뜰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생활 때, 우연하게 선배의 요청으로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하루 일당이 3,300원이었습니다.(85년) 그 당시에 친구 만나서 커피 마시고 점심 먹고 하면서 쓰는 돈이 5,000원을 넘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 받은 용돈이 한 달에 10만원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받은 월급 8만5천 원보다 더 많았던 셈이죠. 하루 종일 일하고도 그 정도였습니다. 그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가난이 개인적인 게으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보니 우리 사회에 너무나 큰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이 사회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겠다 싶어, 공부방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거죠.”

청년 전태일의 심정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의 문제의식이 바로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전이된 느낌이다. 이주노동자 문제로 인해 사회가 원하지 않는 또 다른 전태일을 양성한다면, 국제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해자는 쉽게 잊을 수 있지만 피해자의 멍든 가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자화상이 그러하다면, 그들의 노여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그들에게 선심을 베풀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인권센터를 방문한 다음 날, 노동 분야 전문가 김진 변호사를 만났다. 김진 변호사의 입장도 단호하다.

“우선 연수생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런 다음 보충성과 평등대우가 필요하며, 사업장 이동권 보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노동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겠죠. 또한 외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경로는 아주 복잡한 루트를 거치게 되는데, 제가 파악하기로는 현지인까지 포함해 대략 9개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이 정도면 이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입니다. 따라서 취업알선은 공공기관이 맡아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혜우 소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은 혜택을 자국의 노동문제, 나아가 사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서로 나누는 삶’이 되기 위한 인간관계의 회복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한 동안, 저는 비정상적인 인간상이었습니다. 일밖에 몰랐던 일벌레였죠. 밤에 늦게 집에 가서 잠만 자고, 아침에 와서 일하고,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이주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고민하지 못하고 기능적인 사건 해결을 위한 해결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내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했던 공동체 지원활동과 같은 지향점들이 없어지고 기능적인 일들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제가 어느 순간 이런 기능적인 일, 자기 개발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제게 요구하는 것이 늘어나고 저는 또 제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어났었죠.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잠시 제 시간을 가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즐겁고 신나고 평생 할 수 있는 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면 평생 직업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양혜우 소장에게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삶의 일부분이다. 스스로가 ‘집요한 성격’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이제 갓 1년을 넘긴 조직을 더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도 많다. 재정의 문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인권센터의 활동상을 그려나가는 일이 시급하다. 외국인노동자의 의식 변화, 이를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더불어 사는 활동이 병행되는 것이 양혜우 소장이 밝히는 활동의 상이다. 그런 활동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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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소위, 브로커비로 통하는 이 검은 돈은 어느 나라에서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양혜우소장에 의하면,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상당액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다. 이는 국가정책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데, 여타의 나라는 전액 사비부담으로 1,000만원이 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0만 명일 경우 1조원이 넘는 계산이 나오는데, 불합리한 브로커비를 없애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2002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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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현장보고서"-오관영

이 자료는 2006년 10월 25일 "시민사회연구회[풀뿌리정책포럼]"에서 발표한 오관영(함께하는 시민행동) 처장님의 발제문입니다. 지난 여름, 전국 풀뿌리 현장을 돌면서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공간적인 의미로 지역이 희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역이 희망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 공간이 지역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들의 삶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희망투어를 떠나며”

필자는 지방선거가 끝나고 7월초에 약 3주간 지역을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남원, 구례 등 지라산 5개 권역의 공동교육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워크숍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울산, 여수, 순천, 목포, 제주, 나주, 광주, 부안, 군산, 천안, 옥천, 대전, 청주, 원주, 춘천을 다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지역의 운동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오마이뉴스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현장 보고서 - 희망버스의 16일간 전국일주"를 통해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느릿느릿 세상을 바꿔가는 현장과 풀뿌리 시민운동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겼다.

지역을 찾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민운동이 ‘위기’와 관련하여 하나의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풀뿌리운동의 현장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의 시민운동가들과 시민운동의 고민과 전망을 나누고 싶었다.

지역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들은 멀리서 찾고 있지 않았다. 자신 생활하고 삶의 영위하는 곳에서 생활인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운동가라고 드러내기 보다는 일상의 생활이 곧 운동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말과 실천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민운동을 위기라고 하지도 않는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희망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운동과 생활과 정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5년 10년 후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끊기 있게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새로운 가치, 대안의 가치를 실험적으로 실천하고 내면화 하고 있다. 생협, 공정무역 운동, 지역 통화 운동(LETS)과 같은 대안 경제 운동, 느리게 살기 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의 운동, 귀농이나 문화 등과 같은 지역 공동체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각 지역에서의 다양한 실천이 어떠한 모습으로 네트웍되고 사회를 변화 시키는 힘으로 모아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존의 90년대 식 운동과 다른 새로운 운동이 더욱 많이 실험되고 확산되어야 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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