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언어, 삶의 언어" - 천안KYC -를 찾아
인터뷰 : 장기수(천안 KYC 공동대표)
작 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오늘은 두 이질적인 집단, 즉 한 청년단체와 아파트부녀회의 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들은 천안 쌍용3동을 중심으로 소소하게 ‘마을만들기’를 해나가고 있다. 한국 사회의 거대 담론만을 쫓았던 한 청년단체와 관변적 이미지로 다가왔던 아파트부녀회 주부들과의 조우, 과연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요즘, ‘마을만들기’가 유행이다. ‘마을만들기’라는 운동의 형식이 운동판에 회자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지만, ‘마을만들기’에 대한 해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지금, 어쩌면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던 6,70년대의 농촌 공동체의 모습도 ‘마을만들기’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마을만들기’가 드러내는 요체는 물리적 변화에 있을 것이다. 대구 삼덕동의 ‘담장 허물기’가 대표적이다. 놀이터 가꾸기나 동네 뒷산 가꾸기 운동 등은 그 정신이나 과정이 어떻든 물리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리적 마을만들기는 주민이 편리하게 생활하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도시계획 분야와 맥을 같이 한다. 도시계획을 하되, 행정부만 독점하지 말고 주민도 참여해서 하자는 취지이다. 그러나 ‘마을만들기’는 물리적 변화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부산 금샘마을과 같이 문화적인 접근이나 아파트 공동체 운동으로 접근되는 경우도 많다. 앞서 제시한 담장 허물기, 놀이터 가꾸기 등의 정신도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마을만들기’운동은 물리적인 동네의 개조에서부터 문화적 접근, 공동체 확산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찌 보면, 박정희 정권의 야심작 ‘새마을운동’도 ‘마을만들기’운동으로 생각될 수 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농촌을 근대적 마을로의 개조함으로써 우리 모두 ‘잘살아보자’는 운동이었으니까. 그러나 ‘새마을운동’을 ‘마을만들기’운동으로 받아들이기엔 좀 꺼림칙하다. 둘 사이의 황량한 간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관 주도와 주민주도의 차이만일까? 천안KYC 장기수 대표는 ‘마을만들기’의 요체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마을만들기’의 대상은 ‘마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을’을 만드는 주체들이 올곧게 서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저희의 ‘마을만들기’ 운동은 아파트공동체를 만드는데 있어요. 물론 ‘마을만들기’의 상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저희도 아직은 막연합니다. 이것이 아파트 공동체라든지, 이것이 주민자치운동의 활성화된 동네의 모습이라든지, 하는 희미한 상을 그리고 있지만, 아직은 저희도 발굴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거죠.......그렇지만 ‘마을만들기’의 구체적인 성과물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분명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람의 변화’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마을만들기’는 강요된 참여가 아닌 자발적 참여, 타치(他治)아 아닌 자치(自治),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정신을 뿌리로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관 주도의 강제된 ‘마을만들기’와는 구별된다. ‘마을만들기’는 주민자치, 공동체운동의 또 다른 표현이다.

천안KYC의 ‘마을만들기’운동은 독특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천안KYC의 ‘마을만들기’가 아니라 천안 쌍용3동 주민, 더 구체적으로는 아파트부녀회의 ‘마을만들기’이다. 쌍용3동 주공아파트 입구에는 400년이 넘은 잘생긴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다. 워낙 풍채가 좋은 나무인지라 아파트를 지으면서도 이 두 그루의 나무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런데 장기수 대표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오고 얼마 있다가 이 느티나무가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때가 3년 전, 가만 놔두면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전설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었다. 그래서 뜻 맞는 사람들과 ‘느티나무 동네 사람들’이라는 아파트 단지 내 소모임을 만들고 느티나무 살리기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모금도 받고, 느티나무 옆에서 야외음악회도 하고, 공사를 담당한 주공에 항의도 했다. 모든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은 아니지만 느티나무를 살리자는 취지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잔잔하게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가고 있던 차에, 주공의 원인분석이 나왔다. 수령이 400년을 넘으면서 두 그루 느티나무 뿌리의 일부분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아파트 공사를 담당한 주공 측에서는 그냥 흙으로 그 뿌리를 덮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환기는 물론 배수가 되지 않으면서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 생명의 근원인 뿌리의 성장 조건이 열악해지면서 나무는 점점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느티나무 동네 사람들’은 주공에 책임을 물었고, 주공이 이를 인정, 2천만 원의 수술비를 들여 느티나무의 회생을 시도했지만, 결국 두 그루 느티나무는 죽고 말았다. 자연의 선택을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느티나무 동네 사람들’은 동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저 자신도 93년부터 청년운동을 했었는데, 그런 구체적인 동네 운동을 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느끼는 것도 많았고, 참, 이런 동네 문제가 여러 가지가 있구나, 했죠. 그 다음 나무는 죽고, 죽은 나무를 베고, 베는 과정에 야외 영화도 하고 해서 그 모임이 지속되었습니다. 후속으로 우리가 뭘 할 것인가 하다가, 아파트 주변에 봉서산이라고 조금한 산이 있는데, 봉서산에 불 탄 자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이 사유지이기 때문에 불탄 자리가 방치되고 있었어요. 보기가 흉해서, 우리 모임에서 나무를 심어보자 했지요. 그런 얘기가 나오다가 우리만 하지 말고 부녀회와 같이 해보자 해서 규모가 커졌어요. 그래서 9단지 life 아파트, 10단지, 7단지 이렇게 있는데, 그런 부녀회에 제안을 했고, 규모가 더욱 커진 거죠. 그래서 한 1000그루 나무를 심었어요. 그림그리기 대회도 하고, 빵도 협찬 받고 하면서 행사 치고는 잘 되었어요. 의외로 부녀회에 반응이 좋았죠. 처음에 우리가 나무 살리기 할 때, 무관심했었거든요. 그런데 음악회가 잘 되고, 그런 것에 모범이 되니까, 부녀회도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마을만들기가 시작됐죠.”

이렇게, ‘마을만들기’는 아파트부녀회와 만나게 되고, 지금은 쌍용3동 마을만들기의 주체는 아파트부녀회 주부들이다. 천안KYC는 단지 마을만들기의 파트너일 뿐이고, 서투른 기획력과 실무를 보완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아파트부녀회가 좋은 동네를 위해 주체로 나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으로 청년단체와 아파트부녀회의 조우는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질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으니까. 물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를 지켜본 장기수 대표의 말처럼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려웠어요. 다 아줌마들이고 저 혼자 남자였거든요. 가끔 동네에서 이상한 소문도 돌았어요. 사람들과 사귀다보면 노래방도 가고 그러잖아요. 그럼 대뜸 소문이 납니다. 여자들과 노래방에서 나오는 이상한 남자로 말이죠. 물론 지금은 다 알고 있어서 괜찮은데. 회의 할 때도 제 스스로 안절부절 못하는 거예요. 어색해서요. 그게 한 6개월 가더라고요. 저 스스로 말도 더듬고. 그리고 재밌는 것은, 주부들이 회의에 적응을 못하니까, 한번 삼천포로 빠지면, 한 30분은 기다려야 되요. 저는 급한데, 아줌마들은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돌리려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더 끊기더라고요. 얘기하시다 지치면, “끝났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죠”하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회의 다음 스케줄이 펑크 날 때가 많았어요. 지금은 아예 여유롭게, 매주 화요일에 모이거든요. 그래서 화요일은 시간을 비어놔요. 어떤 날은 오늘 점심 먹읍시다, 하는 때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비어 놓죠. 저희하고 생활리듬이 다르더라고요“

장기수 대표는 주부들과의 조우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다림’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온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삶을 표현한다. 주부의 삶을 모르면, 주부의 언어를 모르면 겉만 번지르르한 남정네들은 영원히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쯤 원기 왕성한 젊은 시설에, 토론할 수 있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우리와 다른 세대를 살아온 어르신들과의 시각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분들이 살아온 삶과 역사적 배경을 한 두 권의 책이나 한 두 번의 대화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르신들의 언어가 필요하고, 주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부들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만들기’의 범주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마을만들기’의 상이 하나가 아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막연함이기도 하다. 장기수 대표의 말처럼, 막연함일지라도 그것을 만드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쌍용3동 ‘마을만들기’의 매개로 구체적인 사업이 있다. 하나는 ‘마을신문’이고 또 하나는 ‘녹색가게’이다. 둘 다 주부들이 이끌어간다. ‘푸른마을’이란 이름으로 발행되는 마을신문은 벌써 통권 9호를 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소식까지 담고 있는 ‘푸른마을’은 충남민언련에서 수여하는 공동체신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신문이든 녹색가게든 이것이 종결점이 아니라 아파트 공동체로 가기 위한 작은 과정이다.

“마을신문의 역할은 상당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아파트 공동체라든지 아파트운동에 대해 뭔지 잘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신문이 나오니까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주부들이 글도 쓰고, 동네 소식을 나누고 하면서 주부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마을신문을 통해 주민들이 동네의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고 동네의 문제를 주부들이 해결할 수 있고, 그것이 이웃과 정을 나누는 아파트 공동체로 가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보는 거죠.”

장기수 대표가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된 8면의 마을신문을 건넸다. 마을의 냄새가 물신 풍긴다. ‘참여마당’이란 코너에 한 초등학교 3학년 친구의 글이 실렸다. 그들의 정겨움을 들어보자.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안녕하세요? 저 준구예요.
아빠는 힘드시게 일 하시는데 저희는 여기에서 놀고 있으니 제가 좀 부끄럽네요.
아빠도 여기에 오셨으면 좋았는데 아쉽네요. 제가 오늘 가본 데는 대청댐, 뜬봉샘이예요.
내일 가는 곳은 용담댐이고요, 저는 여기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게임도 하고 정말 오늘 하루는 재미있었어요.
아빠. 될 수 있으면 언젠가는 금산에 와서 아름다운 산도 보고
깨끗한 물이 어떻게 우리 집까지 오는지 와서 아빠도 들으세요. 알았죠!
음~~그리고 수영장도 커요. 형들이랑 장난치다가 물에 들어가서 옷과 코 눈 입 귀에 물이 다 들어가고 울은 사연이 있었어요.
정말 그때가 아찔했어요. 아빠 같으면 아들인 저에게 그런 장난은 안 하시겠죠? 그러면 저 정말 화날 거예요. 알았죠? 그러니 심한 장난하지 마세요.
그럼 정말 화날(-_-^)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2003년 7월26일 토요일
아빠를 존경하는 준구 올림"


‘마을만들기’는 커다란 무엇이 아니다. 막혀 있는 소통의 부재를 뚫고 너와 내가 가까워짐으로써 ‘생활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생활의 가치는 멀리 있지도, 막연하게 있지도 않다. 그것은 내가 서 있는 동네에서부터 싹튼다. 마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마을만들기’운동을 하나의 이벤트 행사가 아니다. 주체가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일시적인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장기수 대표가 표현한 것처럼, 절차적인 측면에서 마을 만들기의 과정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정착하는 과정이다.

“저희가 진행하는 일련의 마을 만들기 운동은 민주주의를 동네에 정착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주민자치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고, 풀뿌리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우리 동네 동대표 총무를 맡고 있거든요. 그런데 처음엔 너무 놀랐어요. 이 사회에서 자행되는 안 좋은 관행들이 그대로 존재하더라고요. 리베이트를 받는다던가, 수의계약을 하거나 하면서 저는 굉장히 경악했어요. 그 정도로 저도 무지했던 거죠.......민주주의가 정착된다는 것은 투명한 사회와 병합되잖아요. 개인의 의견이 존중되고, 주민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잖아요. 주민자치도 이것이 가장 큰 핵심이라고 보는 거죠.......이런 과정을 주민들이 많이 겪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도 주부들 소모임을 많이 만들려고 합니다. 마을신문이든, 녹색가게든, 소모임이든 주부들 스스로가 서로 나누고 배우고 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고, 항시적으로 운영을 하는 쪽으로 내년에는 계획하고 있어요. 교육과 주민에 대한 재투자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것이 활성화되려면 주민의 의식도 성숙되지 않을까 합니다.”

천안 쌍용3동 ‘마을만들기’운동은 이제 막 재미를 붙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조급해선 안 된다는 교훈도 배웠다. 주부의 언어로 조금씩 마을은 만들어진다. 아직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 모르지만, 그렇게 풀뿌리의 힘은 만들어진다. 천안의 실험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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