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을 조직가로 만든 사연" - 영광 "꽃마을 공부방"을 찾아
<본문 중에서>.........그 이유를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역으로,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채봉정 팀장과 같은 동네 주민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외지인과의 소통이 익숙하지 않은 농촌여성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동고동락하는 한 여성 활동가가 도움을 주는 모양새는 상대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데 쉬운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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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채봉정(영광여성의 전화 농촌여성다지기 팀장)/한미경(자원활동가)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영광에 내려가던 날 눈발이 거셌다. 지난 12월, 전남을 중심으로 2m 가까운 ‘폭설의 추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무사히 영광행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광엔 눈이 없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하늘 구멍이 뚫린 양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부리나케 표를 끊어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영광 땅을 밟고 돌아와야 했고, 동행했던 이호 연구원은 ‘2시간만 있고 가자니 너무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여러 지역을 묶어 ‘지역운동사례 투어’를 3-4차례 하자고 힘차게 결의했다.(한 군데라도 할 수 있을지........)

‘영광여성의 전화’ 내에는 여러 개 활동기구가 있다. 그 중에서 ‘농촌여성다지기’라는 활동기구가 있고, 이 곳에서 농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글교실’이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농촌여성들에게 한글을 깨치게 하는 활동, 즉 ‘문해교육’을 한다. ‘지역운동사례’는 그 동안 주로 도시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그래서 ‘농촌여성다지기’ 사례는 꽤 매력적이었다. 농촌에서 ‘문해교육’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더 넓게는 농촌에서 주민 밀착운동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농촌여성다지기’에서 바쁘신 중에도 두 분이 찾아주셨다. 채봉정 팀장과 한미경 자원활동가가 그들이다. 두 분 모두 농사일을 하고 있었고, 그야말로 농촌에 뿌리내린 농민들이다.

‘농촌여성다지기’는 작년과 올해, 영광군 법성면 월산리에서 ‘꽃마을 여성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 활동은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의 ‘민들레 지역여성운동 사례’에 선정되기도 했다. 자, 우선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시작하게 된 취지를 들어보자.

“특별한 취지는 없었어요. 원래, 저희 옆 마을에서 처음에 시작을 했었어요. 장자동이라는 마을에서 시작을 했는데, 그 때는 활동가가 그 마을에 있는 게 아니었고, 사무실에서 차량으로 운행하면서 관계를 맺었었어요.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었기 때문에 활동이 약했었죠. 그때 같이 하셨던 마을 주민 한 분이, 그 동네와 연계하면서, 이 쪽 마을에서도 한 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보통 농촌마을에 있는 어른들이 자기 고민들을 드러내기 참 꺼려하시잖아요. 그래서 몇 번 권장해드렸는데, 남들한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어요. 옆에 계신 한미경 씨는 마을 활동가거든요. 저도 마을에 정착한 사람이고. 그런 계기라면 해도 되지 않겠나, 처음엔 저희가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무실에서 하면 저희는 부수적으로 해줄 수 있는 역할만 해주자 했는데, 하다보니까, 마을 주민들도 사무실에 오기가 쉽지 않고, 농한기 때문에 아무래도 날씨 관계로 못 들어올 수 있는 상황도 되고. 그러면 마을에서 마을 분들이 어렵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마을에서 마을 활동가가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계가기 됐죠.”

처음 옆 동네에서 시작한 활동이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채봉정 팀장은 그 이유를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역으로,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채봉정 팀장과 같은 동네 주민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외지인과의 소통이 익숙하지 않은 농촌여성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동고동락하는 한 여성 활동가가 도움을 주는 모양새는 상대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데 쉬운 접근법이다. 그렇게 2004년 11월부터 3월까지, 농한기를 이용해 처음 시작했고, 올해 2회 째를 맞는다.

“처음엔 한 반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올 겨울부터는 반을 나눴어요. 2004년에 할 때는 초급반들이어서 같이 하시다가, 나중에 배우시다보면 차이가 나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본인들한테 버거움도 있고, 잘 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뒤쳐진다는 느낌에 부족한 점이 있을 것 같아서 나눴어요. 그 분들한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깨반’ ‘나비반’ 이런 식으로 나눠서, 옆에 계신 한미경 씨는 ‘깨반’을 담당하시고, 저는 ‘나비반’을 담당하고 있어요........‘깨반은 4명이 있고, ’나비반‘은 12명이 있어요........그렇죠. 저희가 하는 것은 ’문해교육‘이죠. 기존엔 문해만 했었는데, 그것만 하면 단조롭지 않나 해서, 저희가 상시적으로 심리치료처럼 미술 과목도 넣었어요. 병행해서 매 주에 한번씩 들어와서 하세요........주로 농한기에 하는데, 처음이었던 2004년에 농번기에도 잠깐 넣었어요. 그런데 저녁 시간대라 약간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집중도 안 되고. 그래서 접고 농한기에만 하죠........일주일에 두 번 모여요. 매번 정확치는 않지만, 2시부터 4시까지 합니다.”

‘꽃마을 공부방’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2개 반이 가동되고 있고, 학생은 16명 수준이다. 주로 한글 깨치기에 중점을 두지만 산수나 미술치료와 같이 다양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일주일에 2번 정도 모임을 갖는다고 하니 꽤 자주 모이는 편이다. 농사일 때문에 농한기 모임은 쉽지 않다고 채봉정 팀장은 말한다. 조금 더 공부방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모임은 공부방 회원 집에서 한다. 가장 편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참여하는 분들은 주로 전부 여성들이고 ‘영광여성의 전화’에서 약간의 운영비를 보조하고 공부방 회원들이 약간씩 부담한다. 마을 이장님도 교재비와 학용품비용 정도를 지원한다. 프로그램 중에는 생태기행이나 반핵평화 등과 같이 공동체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아이템도 들어 있다. 일반적인 현황을 듣고, 무엇이 변화되었는지 물었다.

“변화는 많이 있죠. 본인들이 상당히 당당해지시고 자존감 생성이 참 많이 되셨어요. 항상 한글 때문에 본인들이 어딜 나가도 너무 문자 해독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저하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당당하게 본인들의 의사도 말씀하시고, 농협 같은데 들어가시면 본인들 이름 한자 한자를 쓸 수 있는 기쁨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당함이 있는가 봐요. 그리고 자식들한테 가려져 있던 부분, 본인의 뜻을 잘 드러내지 못하시잖아요. 자식들도 부모한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부분으로 행복하다는 표현을 쓰세요. 감사하다고 하시고.”

문해교육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보람은 바로 이런 부분인 것 같다. 문자를 터득한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당당함과 자존감이 생성됐다고 누차 강조한 채봉정 팀장은 그것이 본인 스스로의 보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부방 회원을 모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희 마을 같은 경우는 크거든요. 농촌 마을 치고 층이 다양하게 있어요. 저희 마을에는 친척 관계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저희 같은 경우는 그 분들과 같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 분들의 성향 하나하나를 동고동락하면서 느끼게 되죠. 같은 입장이다 보니까, 편하게 얘기를 하시고 말씀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되세요.”

모집, 즉 조직은 자연스러웠다고 말한다. 지척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네 주민과의 소통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채봉정 팀장이나 한미경 활동가가 이런 영역의 활동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경험이 있었다기보다는 제가 잠깐 잠깐 장자동 처음 시작할 때 경험해보고,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잠깐 잠깐 봤던 것 정도죠. 제가 한글까지 가르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데 막상 그 분들의 환경이나 생활을 들어보니까, 내가 마음이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은 되겠구나, 해서 하게 됐어요.”

한미경 자원활동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이주여성 계기로 들어와서 했는데요, 작년에 제가 임신하는 바람에 이주여성보다는 가까운 농촌여성다지기로 들어가서 하게 된 거죠. ‘영광여성의 전화’ 회원 가입은 얼마 안 돼요.”

이 대목에서 물었다. 구체적으로 계기가 어떤 것인지.

“........저희 마을에 부녀회라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같이 부녀회뿐만 아니라 농협에 갈 때, 그 분들이 한글에 대한 문자 해독율이 낮기 때문에 굉장히 자존심이 저하되고, 뭔가를 글로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런 아픔들을 뭔가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같이 일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절절하게 해요. 그러면 저 분들도 많은 건 아니지만, 한글 몇 자라도, 기본적인 것을 알게 된다면, 정말 여자로서의 행복감, 삶에 대한 의미도 커질 텐데, 그런 것이 안타깝게 여겨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이 저에게 컸던 것 같아요.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다면 내 삶에서도 큰 기쁨을 얻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생각했던 대로, 거창한 무엇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의 앎을 조금 나누고 도와줌으로써 기쁨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채봉정 팀장이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2회 째를 맞으면서 이런 보람은 이 활동에 대해 확신을 갖게 했다.

“그렇죠. 남자 분들은 학교는 안 다녔었어도 어느 정도 한글을 깨치고 있잖아요. 저희 친정 엄마 같은 경우도, 야학이 있었는데, 못 다니게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있으시더라고요. 이 쪽에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연령대는 차이는 안 나는데, 제일 나이 어리신 분이, 50대 중반 정도 되고, 나머지 분들은 60-70대죠.......참여율은 90%, 100%가 되요. 저희도 처음에 놀랐어요. 그렇게 열성으로 하시니까 어쩔 때는 종이에 글씨를 써서 주시기도 해요.”

아무래도 공부방에 참여하는 분들은 여성들이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지 않다. 황혼 무렵에 그 ‘한’을 풀었으니 참여율도 높을 수밖에 없다. 아무튼 어르신들은 새로운 세상과 접하고 있다.

“미술치료라고 하는 것은 그냥 미술시간인데요, 아이들이 갖고 노는 색채감각 있잖아요. 물감으로 그냥 그리거든요. 처음에는 연필로 본인들 얼굴을 그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본인들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잘 그렸는지 알거든요. 그런데 그리는 자체는 유치원들 수준으로 그리세요.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부끄러워하시고, 왜 이런 것을 우리한테 시키냐, 하면서 싫어하시더라고요. 나중에 그 그림을 보면서 본인들의 모습을 말씀해보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호응도가 있으시고, 색채에 물감으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 여러 가지 도구가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일상에서 애들과 있으면 너무 무료하잖아요. 이럴 때, 이런 물감들을 아이들과 해보면 어때요? 했거든요. 그랬더니, 나도 내 손자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겠구나, 하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문화와 단절된 것에 뒤쳐질까봐, 걱정하셨는데, 이제는 재밌어 하세요........노래 배우기도 있죠. 아직은 노래배우는 입장에서 노래방 같은 곳을 제일 많이 가시잖아요. 그런데 본인들이 글을 잘 모르시니까, 선뜻 가시지 못하고 무료해하시는데, 노래를 네 가지를 배웠거든요. 트로트를 배웠죠.(웃음) 그것을 가족들끼리 적용을 하시죠. 트로트는 굉장히 간단하게 배울 수 있어서요.”

노래방 자막을 읽을 수 있을 때의 희열! 아마도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숙제도 내주냐고 물었다.

“간간히 내 줄 때도 있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걸 다 못 해오시더라고요. 어떤 때는 과제물을 내드리고 하는데,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일주일에 두 번 해도 요일이 빠르기 때문에 버거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하다가 없앴어요. 나중에 과제물을 없애도 그런 문제점이 생기니까, 중간에 한 번씩 과제물을 해오시라고 하니까, 그 때는 조금씩 해오시죠. 그리고 본인들이 서로 약하면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세요. 1년 동안은 못하겠다는 말만 하셨거든요.(웃음) 지금은 조금 열의가 붙으니까, 그때부터는 더 하자,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세요.......받아쓰기는 매번 봐요.(웃음)........숫자 공부할 때,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숫자를 읽는 방법이 두 가지 있잖아요. 예를 들면, 1이라고 하면, 일과 하나. 알고 계시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하면, 잘 생각이 안 나시는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 열의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미 공부방 학생들은 ‘공부하는’ 맛을 터득해가고 있다. ‘꽃마을 공부방’의 목적이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깨우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희 마을에서만 머물지 않고, 인근 마을이나 농촌 마을의 어르신들이 문자 해독률이 너무 없으세요. 그런 사례들 때문에 본인들이 일상에서 필요한 불편함을 많이 겪거든요. 다른 타 단체에서도 많이 하고 있지만, 큰 단위에서 머물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같은 사람 이외에 기존의 농촌에서 젊은 사람들이 농사일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인력이 된다면, 말로 귀로 전달이 돼서, 그 사람들도 저희처럼 힘을 얻을 거 아니에요? 저희처럼. 그런 목적을 가지고 확장이 되고 확산돼서, 다른 사람들도 저희와 연계해서 점차적으로 늘려가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자원활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남게 된다. 그런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현재로는 많이 준비를 못하고 있어요. 저희도 미약한 상태인데요, 정착이 된다면, 그런 계기가 돼서 확산이 된다면, 기존의 우리 단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법성면에서 이 모임 말고 다른 모임에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현재는 모임만 하는 것으로 머물고 있지만, 거기서 제가 그런 사례를 이야기 속에서 하게 된다면, 본인들도 필요하고, 마을 주민들도 필요하다고 많이 말씀하시거든요. 저희 같은 활동가들이 없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니까, 거기에 저희가 본보기가 되고, 저희가 여력이 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고 싶어요. 그런 걸로 점차 늘려가고 싶은 게 저희 마음이에요.”

채봉정 팀장이 꿈꾸는 것은 매우 소박하다. 채봉정 팀장과 같이 젊은 여성들에게 공부방 활동의 필요성을 시나브로 알리면서 월산리 이외 지역으로 조금씩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꽃마을 공부방’을 일종의 모델로 만들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옆에 있던 이호 연구원이 물었다. “내가 배운 후, 남을 가르치는 것에서 오는 보람을 통해 굉장한 변화를 겪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럴 계획은 없는지.........

“아직은 그런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옆 동네 장자동에서 배웠던 분이 계신데, 나처럼 배움을 갖는다면 얼마든지 당당해지고 생활에 많은 기쁨을 얻겠다는 그런 마음 때문에, 마을에 와서 변화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처음에 그 분도 할아버지나 주변 분들이 나이 들어서 무슨 한글을 배우냐, 무덤까지 가져갈 거냐, 이런 핀잔을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본인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으니까, 자랑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당신에게 마음의 당당함과 여유가 높아질 것이라고 하죠. 이런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도 그런 분의 얘기를 해요.”

도미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황혼에 한글을 깨치고, 그 배움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가르칠 수 있다는 삶의 구체적 목적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도미노. 인간 내적 욕구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는 100층짜리 건물이 지어지는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리라.

“지금은 1년 동안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많이 달라졌죠.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과제물을 간간히 내드리면 남 몰래 하시는 경향이 있어요.(웃음).......어떤 분은 아예 안 해오세요. 집에서 절대 공부 안 하세요.(웃음) 공부방에서 하죠. 어르신들은 창피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주변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고 때문에, 오래된 사고죠.......인근 마을 분들이 부러워하시죠. 저희들한테 요청을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여력이 안 되죠. 저희가 나중에 평가를 한 다음에 인력이 된다면 그 마을에 갈 생각은 있어요.”

가르치고 배우는 그간의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미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간의 노력이 서서히 지역사회를 전염시키고 있는 모습에서 이야기만 들어도 신나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물었다. 요청하는 동네는 지역 활동가가 없어서 잘 안 되는 건지.

“예, 그러죠. 이번에 인근 마을에서 시작한 거 보니까, 저희 ‘여성의 전화’와 연계된 건 아니지만, 거기서 1주일에 몇 번의 프로그램을 하거든요. 그 마을에 사시는 분들도 문자 해독율이 낮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저희 얘기를 그 쪽에 말씀을 드렸나 봐요. 그래서 저희한테 요청을 했는데, 저희가 들어갈 수 있는 여력은 안 되겠다, 저희도 1주일에 두 번은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죠. 그러다보니까, 그 마을에 있는 분이 맡아서 하게 됐는데, 거기도 저희와 같은 과정인 것 같아요. 저희는 처음에 시작할 때 모르신 상태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조금 어려움이 있긴 했는데, 거기는 야학을 오래 전에 조금 하신 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도 자원활동 하시는 분이 처음 단계에서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나 봐요. 선입견 같은 것이.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여성의 전화’에서 들어오는 활동가와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에게 대하는 차이의 어려움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저희가 간간히 한 번씩 체크를 해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는 거죠.”

아마 채봉정 팀장은 두 가지를 지적하는 듯싶다. 하나는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라 하더라도 ‘야학’과 같은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외지에서 찾아오는 활동가와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를 분리해서 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은 극복의 대상이긴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동네 활동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동네를 변화시키려거든 이웃과 친해져라!’라는 말이 달리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마을 활동가도 며느리이기도 하고, 아우이기도 하고, 친척이기도 하는 상황에서 가르치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을 법 했다.

“예, 그런 사례가 한 분 있었어요. 저희 활동가 중에 한 분이 그런 분이었는데, 시어머니가 있는 반을 담당했어요. 그렇다고 그게 특별나게 차이 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떤 차이가 있냐면, 저는 같이 일을 하고 같이 동고동락하는 그런 생활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의 힘든 모습을 잘 아는데, 그런데 분은 돈사 일을 하셨거든요. 축사죠. 그래서 마을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시어머니 같은 경우 저와 함께 같이 일하시는데, 며느리한테 당신 모습을 보이는 게 싫으셨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불편한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리고 교사들이 오면 반가운 사람한테 박수를 보내는 성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올 때는 그게 없었던 거죠. 사례, 그런 것에 본인이 느끼기에 얘기를 해요. 왜 나는 박수도 안 줘? 그래요.(한미경 : 저 같은 경우는 멀리서 여기까지 왔다고 박수를 치는데, 그 분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없었나 봐요. 그런 모습이 보이니까 아무래도 같이 관계하는데 어려움이 따라서 그 친구가 접더라고요.)”

여기서도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마을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사람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활동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반일시민(半日市民)인 남성보다 전일(全日市民)인 여성이 그 가능성이 더 높고, 큰 문제보다 작은 일에 참여하는 생활자가 조직가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 끝으로 자원활동가를 모집할 계획, 어려운 점, 그리고 기타 이주여성의 문제 등에 대해 물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이번 인터뷰 마무리를 갈음하고자 한다. 한 가지, 이번 지역운동사례를 조사하면서 이주여성의 문제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할 주요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농촌사회는 이주여성의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고, 가정폭력, 인종차별, 문화적 소외 등 조금씩 속으로 곯아가고 있었다. 30-40대 젊은 농촌 총각들은 제3세계 여성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국가가 또는 지역사회가 이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차별과 소외의 계층’이 생산될 소지가 충분하다. 이런 차별을 감내하면서 국내로 들어오려는 많은 제3세계 여성들이 있고, 그 책임을 개별 가정으로 넘기는 한, 이주여성 문제는 확대․재생산 될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는 올 3월까지 끝내고 기존의 분들한테 권하고 싶어요. 농가주부모임이라든지 이런 곳에요.......저희도 시간적 여력이 생각보다 없어요. 여기에 집중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일상에 들어와 보면 나름대로 일과에 정신없거든요. 그렇다보니까 준비 못 해주는 점. 학업에 필요한 자료를 많이 준비 못해주는 점. 되도록이면 그 분들이 더 많이 알고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자료를 준비해드려야 하는데, 저희들이 그런 것을 못 하고 있어요. 늘 부족한 점이라고 생각해요.......(한미경 : 저도 많이 준비를 못 해오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애가 몇 개월 안 돼요. 어머니한테 맡기도 오는데(웃음). 큰 애도 저기 데리고 왔죠.(뒤를 가리킴))........저희 주변에도 이주여성이 많거든요. 저희가 생각이 있어서 찾아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상당히 경계를 하더라고요.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까지도. 평상시에는 친하게 지냈던 분들인데, 혹시나 여기와 접하면서 도망갈까봐...........그런 인식의 차이가 있죠........공부방 학생들이 저희를 조직가로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주변에 그 분들이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 제가 잘 하든 못 하든, 그 분들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 놓으신 거죠. 그 분들이 이 만큼 저를 성장시킨 것 같아요.”
(2006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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